류현모 교수
류현모 교수

성경의 메타네러티브는 역사를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이 세상의 역사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복적인 범죄의 역사이다.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반복적으로 개입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으로 개입의 절정을 이룬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으며 완성을 향해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종말론적 구속사의 역사관을 가진다. 만일 이런 역사관이 옳다면 인류의 역사 전체가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게 된다. 이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개입은 우리 삶의 방향성과 목표를 암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각자를 향한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달란트를 맡기셨다. 인생을 마무리할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하여 그분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지 결산해야 한다. 이처럼 인간 역사의 마지막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며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그 심판에서 승리할 것이다.

이슬람은 무함마드 이전의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를 이슬람의 역사로 간주하며,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이슬람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무함마드는 AD 570년에 다신교와 정령설이 가득한 메카의 문화 속에서 태어나 40세가 되던 610년에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예언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 알라만을 섬기는 일신교를 주장하다 다신교를 숭상하던 메카 대상들에 쫓겨 622년 메디나로 도망을 가게 된다. 그들은 이 헤지라 사건을 이슬람의 원년으로 계산한다. 이후 메카로 가는 대상들을 습격하여 탈취한 부와 함께 이슬람으로의 개종자도 증가하면서 629년 결국 메카를 점령한다. 이후 부와 무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이슬람을 급속히 확장시킨다. 이슬람의 뜻이 복종인 것처럼 이슬람의 역사는 알라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종교와 정치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한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액톤 경의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말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이슬람의 지도자들은 부패하였다. 더구나 그 권위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으로 취급하기에 그 미래에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이와 달리 불교, 힌두교에서 유래한 뉴에이지는 윤회의 역사관을 가진다. 전생의 업보에 대한 평가에 따라 좀 더 나은 혹은 좀 못한 내세를 부여받게 된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데(색즉시공 공즉시색),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금 당장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생각하여 아등바등 하는 것이 중생들의 문제이다. 이런 윤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크게 걱정할 것이 없고 급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번 생에서 깨닫지 못하면 다음 생이나 그 다음에 깨달을 때까지 계속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또 이들은 우주적 진화를 믿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의 신성도 진화하여 해탈을 이룰 날이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역사관을 가진다. 역사가 이렇게 돌고 돌기 때문에 이들의 역사에는 방향성이나 목적성이 없다. 그저 끝없는 영겁의 윤회를 견디는 일이 있을 뿐이다.

한편 인본주의, 공산주의, 포스트모던주의 같은 세속적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우연의 결과로 해석한다.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우연한 대폭발로 인해 우주가 생성되었고, 우연에 의해 인간이 살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가진 지구라는 행성이 만들어졌으며, 우연에 의해 무생물에서 생물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생물의 진화도 우연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 또한 우연의 산물로서 방향성이나 목적성을 부여할 수 없다. 따라서 한 인간의 삶 역시 우연의 결과로 거기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개인의 삶이 끝나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허무주의적 역사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진화를 통해 생물들이 점점 개선되고 있다는 이론을 자신의 삶에도 적용하면서 근거 없는 낙관론을 주장한다. 특히 막시즘이나 네오막시즘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를 권력자들의 자기 합리화의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 과거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합리화하고 연장하기 위해 역사 다시쓰기를 반복한다.

기본적으로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띠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역사에 방향과 목적을 부여하신다. 하나님의 개입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와 로마 같은 주변국들을 모두 사용하여 그 언약을 실행해 나가신다. 구약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한 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약과 신약의 역사가 하나로 통일된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택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셨고 결국 그것을 성취해 가신다. 이런 성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신 우리의 삶 역시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압제 속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무슬림의 삶이나, 끝없는 윤회 속에서 깨달음을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뉴에이지의 삶이나, 모든 것을 우연의 결과로 생각하는 무신론자들의 삶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명확한 목적을 향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모든 행위, 모든 소유를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목적을 향해 쏟아 붓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라는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를 향한 그분의 부르심을 분명히 깨닫고 힘을 다해 응답해야 한다.

묵상: 성경의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이 당신을 택하여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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