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설교] 옥한흠 목사의 ‘마태복음’ 강해 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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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행복(마태복음 5:8)
故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이미지 캡쳐

* 본지는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故 옥한흠 목사의 생전 주요 설교를 요약해 [다시 읽는 명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오늘 이 본문은 설교자에게 있어 굉장히 어려운 본문이다. 설교자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어 어렵다기 보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바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심과 기도 끝에 설교를 하게 됐다.

사람은 세상을 살 때 무엇을 보고 산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돈을 보고 뛰며, 예술을 하는 자들은 어떤 경지에 눈을 떼지 못하며, 정치인들은 권력과 명예를 항상 눈앞에 두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무언가를 보면서 인생을 사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평생 보면서 뛰는지를 보고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질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대동소이하다. 우리도 불신자들과 같이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예수 믿고 믿음이 좋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고 사는 법은 없다. 그럼으로 우리 역시 각자 성취하려는 목표로 뛰는 삶을 살아야한다.

야곱이 2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면서 그 마음에는 항상 나의 기반을 닦아 독립을 할지가 꿈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평생을 흰 것을 빼고 얼룩진 것을 보고 평생을 살았다. 왜냐하면 얼룩진 것이 다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경쟁사회에서 내가 세운 목표를 생각하며 집중해서 뛰어야 한다.

단지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뛰더라도 그 원하는 것이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비해 믿는 자들이 다른 부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눈, 정신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말한다. 소위 거듭나는 사건이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이 보는 눈은 심령의 눈, 마음의 눈을 말한다. 마음의 눈이 열린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눈을 가지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복되고 형통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마음의 눈이 있다. 마태복음 13장 16절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말한다. 마음의 눈을 말한다.

‘본다’는 것은 거룩하고 영적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인지하고 경험하는 심오한 영적세계를 표현할 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시다. 그렇기에 이 분을 표현할 말이 필요한데 그 의미로 본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를 지닌 비슷한 말이 ‘안다’라는 말이다. 거의 동일하게 사용된다. 에베소서 1장 17~19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눈물 흘려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을 보며 사는 자들이다. 그런데 마음의 눈을 밝혀서 보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더 알게 해 달라고 말한다. 마음의 눈을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빈자리가 없도록 하나님을 가득히 알게 해 달라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마음의 눈을 더 밝아지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게 된다. 모르면 모르는 만큼 하나님은 희미하고 작아 보인다. 성경말씀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가득히 담고 있는 자는 벌써 하나님을 아는 상당한 영적 지식이 있다.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비해 훨씬 하나님을 가까이 보며, 크게 본다. 그럼으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빼 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 에베소 교인을 위해 더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볼려면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해야 된다고 하시는 것이다. 청결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말 그대로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죄는 마음을 자주 더럽게 만든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마음이 달라진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하면 그 마음의 눈은 어두워져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음욕을 품게 되면 마음이 더러워져 아무리 주님을 알아도 안 보인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옆에 두고도 보지 못한다.

‘프랑수아 모리악’이라는 문학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자로 소위 성적인 욕정 때문에 굉장히 고통 받은 사람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욕정과의 싸움을 작품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그가 마태복음 5장 8절 본문을 보고 “마음의 불결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영적세계에도 물리적 세계처럼 따라야하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더 높은 사랑,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는 대로 나아가려면 정결함은 필수요건이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사랑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더러워질수록 하나님께 멀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죄를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둘째, 마음이 갈리지 않는 것을 청결이라고 한다. 이중적, 위선적이지 않은 마음이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 앞에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다. 그러면서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갈리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마음에 두었다가 세상에 나와 돈에 마음을 주고, 하나님을 똑바로 봐야할 신령한 영안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청결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으나 뜨나 하나님을 보길 원하는가. 청결해야한다. 마음이 깨끗하고 갈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이 있는가. 그러려면 우리 마음을 더럽히고 갈라놓는 것을 금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는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

팀 켈러라는 사람이 독신으로 있으니 창녀들에 유혹이 있었다. 마음이 끌리니 몹시 괴로워 일기장에 글을 남기길 “마음의 깨끗함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목적에 내 마음이 몰두할 때에 내 마음이 깨끗해짐을 느낀다.”고 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내 마음이 불타오를 때는 내 마음이 더러워질 틈이 없다. 그럼으로 두 가지가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오르면 내 마음이 깨끗해진다. 그럼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4장 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보고자 할 때 꼭 기억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하게 해서 하나님을 보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보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 하나님으로 가득한 사람, 인간의 생사화복을 다 좌우하시는 하나님을 밤낮이고 보면서 산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항상 내 눈 앞에 있다. 그 하나님의 존족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매일을 사는 사람이라 생각해보라. 그 사람을 두렵게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엇이 불만을 가지고 좌절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면 좋겠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 안다고 할 때는 한 가지 알아 둘 것이 있다. 하나님을 전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는 품성이 있다. 거룩과 사랑, 전능함과 무소불위 그리고 동일하신 품성이 있다. 이런 초자연적인 품성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매달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사랑하셔서 요구를 들어주는데 말씀하시길 “네 요구를 들어 주마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본다면 살지 못한다. 그러나 네 요구를 들어 주마” 하시면서 모세 앞을 지나가면서 손으로 모세를 잠깐 덮었다가 보여 주는데 모세는 그 분의 등만 살짝 보았다고 표현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등만 살짝 보는 것이다. 품성 중에 하나를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처한 형편에 따라서 나에게 은혜가 되는 하나님의 일부분만을 알게 되고 경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75세 때 약속을 받았다.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나이로 봤을 때 1~2년 안에 주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25년 동안 가만히 계셨다. 자신도 아내도 나이가 늙어간다. 세월은 흘러간다. 아브라함은 성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어 전 인류가 복을 받는 메시야에 조상이 됐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길 때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에게 하나님은 목자처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시다. 그가 신하의 아내를 빼앗아 상심해서 기도할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만 보았다. ‘리빙스톤’이라는 선교사도 아프리카라는 검은 대륙을 들어갈 때, 그가 바라 본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였다. 그 하나님만을 본 것이다.

저에게도 하나님이 있다. 몇 년 동안 심적으로 고통을 당했다. 여러분을 보면 겁이 난다. 내가 잘못하면 여러분의 영혼이 병이 나고, 제가 잘못하면 여러분이 엉뚱한 길로 간다. 이곳은 하나님의 교회이다. 여러분만 보면 겁이 나고, 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주 진통하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보는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제 형편이 그러니 그런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보며 살아가는가. 그런 보이는 하나님을 보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한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오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에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제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명상하는 것에는 모든 슬픔을 근절시켜주는 것이 있다. 성령의 감화력 안에는 모든 아픔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가 있다. 여러분의 슬픔과 염려를 잊고 싶은가. 그렇다면 심성의 깊고 깊은 바다, 하나님을 보는 깊고 깊은 바다에 잠겨보라. 하나님의 광대함에 몰두해 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편히 쉬다 나온 사람처럼 기운이 나고 생기가 돌 것이다. 저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영혼의 위로를 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슬픔과 비탄이 굽이치는 파도를 그처럼 진정시키며 시련의 바람을 평온하게 해주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고백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가서 보는 자는 마음의 병을 다 없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의 연속이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의 연속이다. 우리가 왜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왜 살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영생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한번 뿐인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 다시 말해 땀 흘려서 가꾸어 보람된 무언가로 만들려면 거기에 부흥하는 큰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해야 되는 이유도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날마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 더 높고 순고하고 매력적인 목표가 없다. 그럼으로 겸허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왜 너는 날마다 비참해지는가.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날마다 힘을 잃고 주저앉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유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자.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더렵혀져 있고, 갈라져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여도 희미하게 보인다. 희미하게 보이는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탄식하지 말고 원인을 찾아야한다. 내 가정이 왜 이 모양인가. 부부사이가 왜 안 좋은가. 내 자식이 왜 저 모양인가. 이유를 찾아보라. 하나님을 다 보고 살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겠는가. 그럼으로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는 자들이 진정 행복한 것이다. 세상을 보지 말라. 속는다. 사람을 보지 말라. 우리는 실망한다. 오직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이요, 밝게 사는 비결이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언가 보여 줄 수 있는 비결이다.

범선이 한창 대서양과 태평양을 누비던 시대에, 선원이 되겠다고 배에 오른 젊은이들을 훈련시킬 때 자주 높은 돛대 위에 올린다고 한다. 돛대 위에서 돛을 감던지 망을 보면 정신이 없다. 배가 흔들리면 현기증과 떨어질 것 같고 힘들다. 처음 배를 탄 젊은이는 비명을 지른다. 이 때 경험만은 선원은 소리친다. “바다를 보지 말고 하늘을 보라. 왜 아래를 보니, 위를 보라.”고 한다.

위를 보고 하늘을 보면 아무리 배가 요동을 쳐도 두렵지 않다. 자꾸 아래를 보고 물을 보니 정신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세상이 요동쳐도 절망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하나님이 보여도 희미하게 보이느냐 뚜렷하게 보이느냐, 작게 보이느냐 크게 보이느냐에 좌우된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다. 마음이 청결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그 사람이 세상이 어떻게 감당하고, 그 사람을 누가 이기며, 그 사람이 좌절, 절망, 불만이 있겠는가. 하나님을 보는 자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탕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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