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설교] 옥한흠 목사의 ‘마태복음’ 강해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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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먹고 자란 행복 (마5:4, 눅6:21,25)

* 본지는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故 옥한흠 목사의 생전 주요 설교를 요약해 [다시 읽는 명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故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이미지 캡쳐

몇 일전에 시내에 있는 대형서점으로 나갔다. 유머 책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어 놀라웠다. ‘유머는 행복에 시작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 등에 표지 제목에 책들이 많다. 사회가 워낙 살기가 어려워 짓눌리고 답답하고 잘 안 풀리는 그런 분위기에서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려 웃음을 찾는 것 같다. 크게 웃으면서 답답한 마음을 다 해결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무거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눈물과 애통이라는 말은 마음에 큰 도움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다. 저희가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성경에만 하는 역설이 있지만 기독교를 대변하는 성경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눈물, 슬픔을 소개하는 단어가 몇 가지 나오지만 본문에 애통이라는 말은 억양이 강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통곡하는 모습을 애통이라고 한다.

야곱은 막내 요셉을 잃어버리고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통곡하는 모습을 본다. 이 모습을 표현하기로 ‘애통’이라고 한다.

애통이라는 말이 이처럼 강하고 진하다고 해서 야곱처럼 통곡하며 눈물을 흘려야 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의미하는 것은 제가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의 거룩한 탄식을 말한다.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비울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애통이 따라온다. 심령이 비우지 못했다면 애통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반세기 이후 한국교회는 애통하던 시기였다. 8.15 시대 이후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 눈만 감으면 눈물을 흘렸다. 마룻바닥에 눈물 자국이 너무나 선명해서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다.

우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의 전부는 아니다. 애통이 기독교에 전부는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마른 눈을 가지고 모인 성도들이 모인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지고 모인 성도들의 교회가 훨씬 더 은혜의 세계를 깊이 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애통하는 눈물을 보기 어렵다. 눈물이 메마른 것 같다. 웃음이 복음으로 들리고 눈물은 비복음으로 들리는 분위기이다. 어느 신문 광고에 유머와 설교, 세미나를 선전하는 것을 봤다. 사람들을 웃기면 분위기 좋아진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저도 웃는 것을 우는 것 보다 더 좋아한다. 교회도 많이 웃기고 기분 좋게 해야 ‘아멘’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눈물이 말랐다. 심각한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한다. 기분 좋게 웃어야 은혜 받았다고 착각한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말은 거리가 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이미지이다.

눈물이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짧은 인생을 살지만, 눈물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눈물 자체가 고유한 가치와 무게를 가진다. 아무리 웃음이 우리를 기쁘게 해도 웃음이 눈물을 대체할 수 없다. 고유한 영역이 있다. 만일 눈물과 슬픔이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의 인생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진 것이다.

‘모든 햇살은 사막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비가 쏟아져야 한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쏟아져야 생명의 환희가 있다. 눈물이 없는 곳은 사막이다. 눈물이 없으면 웃음 자체도 하나의 광대노릇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아는 자는 인생을 아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 눈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눈물을 통과하지 아니한 신앙은 하나에 값싼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나서 웃기만 했는가. 아직은 값싼 신앙이다. 예수 믿고 나서 울어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차원을 아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애통이 우리의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한다. 눈물이 우리의 신앙을 본질로 인도한다. 눈물이 고인 눈에 십자가에 주님이 보인다. 젖은 눈에 부활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애통하는 심령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발걸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넘어 성숙해진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자는 눈물을 부정적 애통을 무조건 두려운 것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에는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탄식으로 쓴다. 로마서 8:23을 보면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한다. 즉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은 날마다 탄식하며 기다린다. 이 썩은 몸 빨리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영광스런 몸을 함께 입을 그날, 양자될 날, 우리 몸이 구속될 그날을 사모하면서 탄식한다고 했다.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탄식’이다.

신앙생활에서 눈물이 얼마나 중요하진 깨닫길 바란다. 신앙생활에 밑바닥엔 눈물에 강이 흐른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을 모르는 신앙은 천박한 신앙이다.

누가 애통하는 자인가. 자기 죄를 놓고 먼저 눈물을 흘리면 애통하는 자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다. 꼭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고 무조건 우리를 죄 없다고 하시지만, 죄로 부터 차단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죄의 작업장이라는 부패한 몸을 입고 있다. 100번도 죄를 지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누구든지 성령 충만을 받아서 회개할 것 없는데 왜 질질 짜냐고 말한다면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은 거짓말 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울어야 될 이유가 충분하다. 하루에 100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애통해야 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애통해야 되는 것이다.

종종 저 자신을 답답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옥 목사를 위시해서 사랑의 교회가 뻔뻔스럽지 않나 생각한다.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교회에서는 몇 마디 말로 죄가 다 용서받은 줄 안다. 가슴에 진정 회개하는 자세가 잡혀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 입술에 기도를 들으시고 진정 깨끗해 하시는데...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해야한다.

마틴 루터가 95개조 항의문을 성당에 붙인 내용에서 신앙인 삶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회개와 차별을 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이에 자녀이기에, 구별된 사람이기에 죄를 씻는 눈물이 필요하다. ‘내가 저 사람보다 선하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시기에 내가 얼마나 선한지’가 표준이다.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추악함을 더 보게 되고 더 애통하는 심정을 가진다. 예수님과 멀리 떨어진 자는 애통할 일이 별로 없다.

구원의 확신을 없어,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느끼기에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는 것이다.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앞에 벌거벗은 듯 노출되는 나 자신을 순간순간 볼 때 마다 나의 악함을 가지고 탄식하는 것이다.

자기의 죄를 가지고 애통하는 것을 다윗은 시편 51편에 애통은 상한 마음, 통회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심령에 복이 있다고 하시며 평안과 만족의 은총을 주신다고 했다. 이것이 위로이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주님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우리 눈에 탄식과 통회하는 눈물이 있을 때 우리의 심령의 위로의 무지개가 서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 앞에 뻔뻔스러운 사람 되지 말라.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자가 애통하는 자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설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6장 25절에서 배부른 자, 웃는 자에 희희낙락하는 하는 것을 저주로 보시고, 누가복음 6장 21절에서 주린 자와 우는 자를 경건한 자로 보신다. 우는 그 삶 자체를 복이라고 보신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젖은 눈이 마른 날이 없이 사는 자들이 많다. 강남에 화려한 아파트만 보지 말라. 우리가 좀 눈높이를 낮추어 조용히 살펴보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에게도 얼마나 눈물이 많은지 모른다.

예수를 잘 믿는데 가난이 왜 떠나지 않는지. 왜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왜 자녀가 탈선하고, 왜 경쟁에 뒤지고, 왜 손해를 입고, 왜 하루아침에 건강이 악화되고, 억울하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등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날마다 눈물로 살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가슴에 찾아드는 이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많은 이들이 웃고 즐기는 시간에 조용히 엎드려 기도하면서 서러움을 거룩한 눈물로 씻어내는 거룩한 성도들이 많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일지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이 세상에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사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볼 때는 불행한 사람들이 꼭 저주받은 사람 같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요.
눈물로 기도하는 자여 너에게 복이 있다. 히스기야 왕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고 기도를 들었다고 얘기하신다.

지금 내 눈 앞에 당장 아픈 자가 치유되지 않고, 가난이 물러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의 애통이 복이 있느니라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복이 있다’고 하신다.

우리의 눈물을 아시는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그 자체가 위로요 소망이요 행복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주의 자녀들에 눈물을 씻어 주실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지만 알지 못한 악한 성이었다. 40년 뒤에 거기에 임할 심판을 내다보고 우셨다.

사도 바울도 애통하던 때가 있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원수들이 교회 안에서도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견딜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던 것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라. 웃을 일이 많은가. 우는 일이 많은가. 이 나라에 죄악상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과거에 지금처럼 죄를 범한 일이 있었는가. 이처럼 악하고 더럽고 음란함이 과거에도 있었던가.

오늘날 중고등부 학생들이 90%가 음란물을 접촉한다. 예수 믿는 아들과 딸들이 노출되어 있다. 어떻게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이 마약중독자처럼 계속 음란물 접촉 시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떻게 통곡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선진국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 최고급 양주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수입하는 나라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나라를 두고 어떻게 통곡하지 아니하겠는가. 우리 모두 이 백성에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애통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하는 교회만이 이 땅에 희망을 줄 수 있다. 정치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교육자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돈 벌기에 급급한 기업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이 땅에 소망이 있다면 이 나라에 죄를 나의 죄로 여기고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과 사도처럼 눈물 흘려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교회만이 소망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믿지 않는 이웃을 위해서 애통하라. 반드시 너의 애통이 헛되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 이 땅에 문제는 예수 믿는 자들이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물이 메마른 것이다. 너무 뻔뻔스럽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많은 위로의 축복을 놓치고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는 이 말씀을 깊이 새기고 내 죄를 놓고 애통할 줄 아는 사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도 주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할 줄 아는 사람, 나의 민족의 짐을 짊어지고 이웃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될 때에 우리가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가정이 살고 이 나라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다 같이 기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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