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의 기고글인 ‘왜 기독교는 틀렸다고 입증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그렇지 않은가' (Why Christianity can be proven wrong — and most religions can't)를 9월 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톤스트리트 회장은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신앙과 문화, 신학, 세계관, 교육 및 변증법 분야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이스라엘 고대유물관리국(IAA)은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6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탄 목재 기둥들을 발견했다. 그 연대는 열왕기하 2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멸망 시기와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사건은 성경에서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절정으로 묘사된다.
이 같은 고고학적 발견은 적어도 성경이 묘사하는 고대 예루살렘의 파괴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잔해가 2,6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남아 오늘날까지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이 이후에도 수많은 침략과 파괴, 재건을 반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번 발견을 다룬 한 보도에서는 발굴 책임자들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이 재건될 당시, 후대 사람들이 그 참혹한 사건을 기억하도록 일부 잔해가 의도적으로 남겨졌을 가능성을 제기했다고 전했다.
이런 해석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의 전통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라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돌을 세웠다. 사무엘상 7장에서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사무엘이 돌을 세우고 그곳을 ‘에벤에셀’이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시편 77편과 105편, 이사야 46장 등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이 기억은 단순한 향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 하나님의 구원과 신실하심을 기억함으로써 현재의 믿음을 굳게 하고, 동시에 불순종이 가져온 심판 역시 잊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가 역사적 사실에 특별히 민감한 이유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특징 하나가 드러난다.
모든 종교가 역사와 동일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 전통은 주로 철학적 가르침이나 도덕적 규범, 영적 체험과 수행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종교의 신화적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인지 여부가 신앙의 핵심을 좌우하지 않기도 한다.
반면 기독교의 중심 주장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주장과 떼어놓기 어렵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다시 살아나셨다고 주장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는 게바와 열두 제자뿐 아니라 한때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예수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부활을 단순한 영적 상징이나 내면적 체험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제시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이 점에서 기독교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핵심 주장을 역사 속에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께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처형이 없었다면, 부활이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면 초기 기독교가 주장한 복음의 핵심 자체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사도들은 ‘신화’가 아니라 목격을 주장했다
베드로 역시 자신들의 메시지를 신화나 종교적 우화와 구분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고 기록했다.
그의 주장은 분명했다. 자신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적 신화가 아니라 직접 보고 들은 사건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도마 역시 비슷한 장면을 보여준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의심을 꾸짖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다.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확인하도록 하셨다.
이 장면의 의미는 중요하다. 기독교 신앙은 ‘증거를 요구하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신앙이 아니다. 적어도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실제 사건에 근거한다고 확신했고, 그 사건을 목격과 증언의 언어로 설명했다.
사도신경에 왜 본디오 빌라도가 등장하는가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은 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본디오 빌라도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다. 그는 실제 역사의 특정 시기에 유대를 통치했던 로마 총독이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 한가운데에 정치적·역사적 인물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예수님의 죽음이 막연한 신화적 시간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다윗, 본디오 빌라도와 헤롯,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갈릴리와 로마 같은 사람과 장소가 등장한다. 이 이름들은 실제 역사와 지리 속에 자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여러 기록은 고고학과 고대 문헌,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고고학은 성경을 ‘증명’하는가
여기서는 한 가지 균형도 필요하다. 고고학이 기독교 신앙 전체를 수학 공식처럼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고고학은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 발굴할 수 없으며, 특정 유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신학적 주장이 자동으로 입증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성경이 묘사하는 역사적 배경과 인물, 장소, 도시의 파괴와 재건, 고대 사회의 문화와 관습 등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로 발견은 성경 기록과 일치하고, 때로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며, 어떤 사안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으로 남는다. 이것 자체가 오히려 중요한 점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조사와 질문을 원천적으로 거부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실제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 주장은 다른 역사적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조사와 검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증 가능성’은 기독교의 약점일까
철학에서는 어떤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원칙적으로 증명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두고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을 종교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기독교는 적어도 핵심적인 몇몇 주장에 대해 역사적 위험을 감수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이 실제로 죽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특히 부활은 결정적이다.
바울 자신이 말했듯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단지 조금 수정해야 할 정도가 아니라 그 핵심에서 무너진다.
이것은 기독교의 약점이라기보다 오히려 독특한 자신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초대교회는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영적인 의미만 받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은 추상적인 진리나 막연한 경건함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셨다는 주장 위에 세워져 있다.
다윗은 성경 속 상징적인 왕으로만 제시되지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살아간 인물로 묘사된다.
예수님 역시 단순히 사랑과 용서를 가르친 종교적 현자가 아니다. 신약성경은 그분이 실제 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아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제자들이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증언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독특한 성격이 드러난다.
기독교는 단순히 “이 가르침이 삶에 도움이 되는가”만을 묻는 종교가 아니다. 나아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만약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자신의 중심 주장을 잃는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취향이나 개인적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역사적 주장이다.
기독교는 자신을 단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조사될 수 있고, 질문받을 수 있으며, 역사적 증거 앞에서 검토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