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제이 앳킨스의 기고글인 '이번 여름 폭염은 종말이 아니다. 침착함을 위한 기독교적 근거'(This summer heat wave isn't the apocalypse. A Christian case for calm.)를 7월 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제이 앳킨스는 낮에는 뉴욕에 기반을 둔 기술 기업에서 정부 관계 담당 변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평신도 저자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신앙의 근거와 그것이 공공정책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또 어떻게 맞닿아야 하는지를 주제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또 한 번의 여름 '열돔(heat dome)' 현상이 대륙의 상당 부분을 뒤덮으면서, 언론의 헤드라인 역시 날씨만큼이나 뻔하게 흘러가고 있다. 모든 폭염은 기후 종말이 도래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케이블 뉴스는 끔찍한 예측들로 넘쳐나고, 정치인들은 전면적인 새로운 규제들을 약속한다. 활동가들은 인류가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대재앙은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기독교인이자 보수주의자인 필자는 양측 진영 모두를 답답하게 만들지도 모를 고백을 하나 하려 한다. 필자는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만,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는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역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역사는 곧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해 온 인류의 역사다. 강의 줄기가 바뀌고, 해안선이 이동한다. 사막은 확장되기도 하고 수축하기도 한다. 빙하기가 왔다가 물러간다. 비옥한 계곡에서 제국이 번성했다가도, 훗날 그 계곡이 메마른 사막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사람들은 이주하고, 국가들은 자원을 두고 싸운다. 낡은 문명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문명이 등장한다. 변화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다.
진정한 질문은 기후가 변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기후는 엄연히 변하고 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인류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은 오늘날의 환경 논의에서 철저히 빠져 있는 놀라운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소망'이다.
성경은 인류를 우주적인 우연의 산물이나 지구를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유한 존재이며, 그분의 창조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릴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선언한다.
창세기의 이 명령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다스림(dominion)은 무자비한 '착취'가 아니다. 그렇다고 청지기 직분(stewardship)이 아무것도 손대지 않는 '수동적 보존'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부르셔서 땅을 경작하고, 개선하며, 그 풍성함을 끌어내도록 하셨다. 또한 우리에게 특별히 부여하신 이성, 창의성, 혁신이라는 선물을 사용하여 인류의 번영을 도모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태초부터 이어져 온 문명의 이야기다. 가뭄이 위협할 때 우리는 관개 시스템을 구축했다. 강물이 범람할 때 제방과 댐을 설계했다. 질병이 퍼질 때 위생 시스템과 현대 의학을 발전시켰다. 숨 막히는 폭염이 사람들의 주거와 노동 환경을 제한할 때 에어컨을 발명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 수십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업 혁신을 이루어냈다.
모든 세대는 저마다의 환경적 위기에 직면해 왔다. 그리고 모든 세대는 그 위기에 '절망'이 아닌 '창의적인 대처(ingenuity)'로 응답해 왔다. 그 창의력은 진화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의 일부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오늘날 만연한 환경 관련 수사(rhetoric)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현대 기후 행동주의의 상당수는 '두려움' 위에 세워져 있다. 기상 현상 하나하나가 세상의 끝이 다가왔다는 증거로 둔갑한다. 모든 과학적 예측은 더 강력한 정치적 통제를 위한 구실이 된다. 이제 수많은 산업, 옹호 단체, 정치 운동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재앙이 늘 코앞에 닥쳐 있다고 세뇌시키는 데 그들의 존립을 의존하고 있다.
두려움은 그들의 모금 전략이자 통치 철학이 되어버렸다. 기독교인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환경 문제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활동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라는 것도 아니다. '공포'를 지혜로 여기고 '절망'을 미덕으로 삼는 세속적 세계관을 수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언제나 절망이 아닌 확신과 신뢰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역사가 무작위적인 혼돈이 아니라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음을 믿는다. 인간은 자연의 무기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놀라운 은사를 위임받은 유능한 청지기임을 믿는다. 우리는 과학적 발견, 기술 혁신, 자유 기업, 그리고 책임감 있는 정부가 인간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들이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합리적인 능력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는 자연을 숭배하는 것도, 그것을 무모하게 착취하는 것도 아니다. 환경적 숙명론에 굴복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청지기의 사명(stewardship)'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호하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의 번영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가꾸는 것을 의미한다. 타당한 곳에 더 깨끗한 기술을 개발하고, 더 회복력 있는 지역 사회를 건설하며, 과학 지식을 발전시키고, 자연이 던지는 그 어떤 도전에도 지혜롭게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은 기독교인의 미덕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덕은 '믿음'이다.
기후는 계속 변할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다. 인류는 계속해서 적응해 나갈 것이다. 우리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언제나 부름받은 바로 그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미래가 활동가, 정치인, 혹은 전문가들의 손이 아닌,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굳게 믿고, 차분하고 소망이 넘치며 신실한 청지기로서 말이다.
그러니 시원하게 에어컨을 켜고, 무더위를 피해 평안한 하루를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