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있는 분명한 한 가지 진실이 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쌓아 올린 업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이 이미 우리를 존귀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성공주의 문화는 더 높은 곳으로 오르라고 끊임없이 채찍질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경쟁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성취로 줄 세우거나 비교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으신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자신만의 색채로 빛나도록 부르시고, 각 사람을 고유한 모습으로 창조하신 그분의 섭리를 드러내실 뿐이다. 지금 돌아보면, 이 땅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그 모든 선택의 이면에는 내 셈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었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이후 이민 목회의 현장으로 나가게 된 것도 모두 그분의 인도하심이었다.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웃음, 좌절과 회복을 목격했다. 그래서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의 규모가 크든 작든, 세상의 눈에 띄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라면 그 자체로 영광이다.
오용주 – 인생행전
오늘날 한국 교회 예배는 형식만 남아있어서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을 만나기는커녕 하나님의 임재조차 느낄 수 없는 죽은 예배에 실망한 청년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고, 절반 이상의 교회에 어린이 주일예배가 문을 닫았다. 전 세계 교회가 부러워했던 한국교회의 자랑, 새벽 기도회의 열기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설교는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정작 생명의 말씀은 메말라 버렸다.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양식이 아닌 설교”(사55:1-2)를 듣고 앉아 있지만, 영적으로 살아있는 성도들(엡2:1)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에 목말라 동서남북을 찾아 헤매고 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 바로 회개이다. 부흥은 반드시 회개라는 문을 통과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 죽은 교회였던 사데 교회를 향하 “회개하라”(계3:1-3)고 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다.
손원배 – 회개 없는 구원
당신이 죄를 짓고 나면 죄가 당신을 짓는다. 당신이 하나의 죄를 끝냈다 해도 죄는 아직 당신을 끝내지 않았다. 당신이 짓는 죄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살아서 당신을 삼키려 한다. 죄에 그런 위력과 독기가 있다. 죄의 임무는 당신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죄란 우리의 뿌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내리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죄를 단순히 규율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죄를 그런 식으로만 정의하면, ‘죄’와 ‘경건’을 동일한 스펙트럼 위에 놓인 ‘정도의 차이’로 보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관점대로라면 하나님의 법을 50회 위반한 사람은 죄인이지만, 3회만 위반하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5회 위반한 사람은 그 중간쯤 될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죄를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절반쯤 선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와 경건은 마음의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이고 뿌리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거나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뿌리를 내리거나.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나머지가 결정된다.
팀 켈러 – 팀 켈러, 죄를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