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공동체’라는 신화: 완벽한 교회를 찾을수록 더 외로워지는 이유

필립 스미스.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필립 스미스의 기고글인 "‘편안한 공동체’라는 환상: 완벽한 교회를 찾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외로움을 키우는 이유"(The myth of cozy community: Why your search for the perfect Church is making you lonelier)를 4월 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필립 스미스는 HOPE International의 선임 개발 홍보대사(Senior Development Ambassador)로 섬기고 있다. 그는 이전에 HOPE의 저축그룹 프로그램 선임 디렉터(Senior Director)로 재직하며 조직의 글로벌 팀을 이끌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 공동체를 파괴하게 된다.” ㅡ 디트리히 본회퍼, 『함께 삶(Life Together)』

오늘날 우리는 현대 역사에서 유례없는 관계의 위기를 살아가고 있다. 모임에 참석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온라인으로 친구들과 연결되며, 매주 교회 예배에 나아가면서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포함해,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외로움을 느낀다고 응답한다. 그러나 이러한 만성적인 고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창세기 2:1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와 공동체를 위해 창조하셨다.

전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 점점 더 깊어지는 고립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고민은 예배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외롭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의도하신 공동체—깊고 의미 있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삶을 함께 나누며, 서로에게 헌신하는 공동체—안으로 실제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공동체가 현대 사회의 외로움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하고 글로 정리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더 깊은 연결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주일 오후, 소그룹 멤버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즉시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주를 준비하며 잠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배터리가 방전됐어요. 차가 시동이 안 걸립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는 분 있나요?” 단체 메시지였기에 처음에는 다른 누군가가 도와주겠지 생각하며 모른 척하고 싶었다. 그 순간의 휴식이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공동체에 대해 연구하며 고민해 온 내용이 떠올랐다. 공동체는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고립의 대가는 훨씬 더 크다. 아주 작은 선택일지라도, 그것은 필자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문제였다. 공동체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는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떠올랐다.

‘편안한 공동체’라는 신화

과도하게 바쁜 일정과 잦은 이동 등 여러 요인이 우리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생명력 있는 공동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일정표보다 기대치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실제 경험을 결정하고, 때로는 방해하기도 한다.

현대 문화는 빠르고 편리하며 번거롭지 않은 경험을 선호하도록 우리를 길들여 왔다. 이러한 기대는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친구들이 마치 긴급출동 서비스처럼 언제든 우리의 필요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대화는 매끄럽기를 원하고, 생각은 일치하기를 바라며, 시간 부담은 적고 감정적으로도 편안하기를 원한다.

어색한 침묵이나 예상치 못한 충고, 기대와 다른 결과, 생각의 차이를 불편해한다. 관계 속에서 다리를 놓기보다 경계를 세우는 것을 더 우선시하기도 한다. 팀 켈러는 이러한 태도를 관계에 대한 “소비자적 접근”이라고 설명했다. 관계보다 개인의 즉각적인 필요가 우선되는 방식이다.

“노력해 봤지만 잘 안 됐다”, “이 관계에서 얻는 게 없다”와 같은 표현은 소비자적 사고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관계 속에 스며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소비자적 관계는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희생과 불편함, 갈등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대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현실의 불완전한 사람들과 충돌할 때, 우리는 “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더 나은 관계를 찾아 떠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오히려 우리가 벗어나고 싶었던 외로움을 더욱 깊게 만든다.

팀 켈러는 이러한 소비자적 관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성경이 말하는 ‘언약적 관계’를 제시했다. 언약적 관계에서는 개인의 단기적인 만족보다 관계 자체의 선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문화에서는 헌신과 책임보다 시장 논리가 관계 영역까지 지배하면서 이러한 관계가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

시대를 거스르는 명령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서로(one another)’라는 표현을 반복하시며 상호성, 함께함, 그리고 타인을 중심에 두는 삶의 방식을 강조하셨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언약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서로 섬기고, 세워 주고, 환대하고, 기도하며, 짐을 함께 지고, 돌보라고 권면한다.

이러한 사랑은 개인의 편리함과 독립성, 취향을 우선시하는 오늘날 문화와 대조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인 원리 속에서, 이러한 사랑은 오히려 우리를 풍성하게 만든다. 헌신적이고 언약적인 사랑은 신자뿐 아니라 세상이 경험하는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해답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 서로에게 나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통로가 될 수 있을까.

첫째, 공동체의 불완전함을 예상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진실한 공동체에는 어색함과 갈등, 실수가 존재한다. 이러한 마찰을 실패로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숙해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잠언 27:17) 관계는 서로를 성장시킨다.

둘째, 편리함보다 헌신을 선택해야 한다. 관계 속에서 즉각적인 유익이 보이지 않을 때 떠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통해 어떻게 우리를 빚어 가시는지 바라보아야 한다. 나 중심이 아닌 우리 중심의 관계를 선택하고, 관계 속에서 인내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셋째, 화면보다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을 선택해야 한다. 소셜미디어의 ‘좋아요’나 메시지는 일시적인 만족을 줄 수 있지만, 진정한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기를 힘썼다”(사도행전 2:42). 오늘 우리도 동일한 결단이 필요하다.

넷째, ‘서로 사랑하라’는 동사를 실천해야 한다. 섬기고, 환대하고, 기도하며, 서로 세워 주고, 짐을 함께 지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핵심이다. 작은 실천을 반복할 때 관계 속 사랑이 자라난다. 예수님은 사랑을 느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다.

다섯째, 완벽한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본회퍼의 경고처럼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기대는 실제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완벽함을 기대하기보다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워야 한다.

서로에게 다시 나아가는 길은 편리함보다 헌신을 선택하는 길이며, 소비자적 관계에서 언약적 관계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외로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알려진 공동체가 된다.

필자는 그 주일 오후, 결국 친구의 메시지에 응답했고, 편안한 의자에서 일어나 자동차 배터리를 구입하러 나섰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고립에 맞서는 작은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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