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Loving people into Hell)을 3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얼마 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기독교인 친구 부부가 필자와 아내를 찾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서로를 알고 지낸 사이였고, 같은 교회에 출석하며 그들은 그동안 필자가 인도했던 여러 성경공부에도 참여해 왔다.
식사 중 한 친구가 자신의 기독교 이해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변화”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믿지 않는 친구들을 향해 지나치게 정죄적이고 거칠게 대했던 일부 신자들의 모습을 경험한 이후, 이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자”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성경적 가르침과 도덕적 기준에 긴장 관계에 있는 믿음과 생활방식까지도 인정하고 지지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그러한 생각을 축하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고, 마음속에서 지금은 깊이 토론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필자는 일단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오래전에 들었던 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한 남자가 새로운 도시로 이사한 뒤 교회를 찾다가, 모든 믿음과 삶의 방식을 포용하며 “하나님께서 결국 정리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교회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교회를 떠났다. 친구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나를 사랑으로 지옥까지 데려갈 사람들이었다.”
진리를 동반한 사랑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어려운 균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다.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가 독선적이고 정죄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던 장면을 기록한다:
“예수께서 집 안에서 식탁에 앉으셨을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0–13).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여자가 말하였다. ‘주여,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옳다’”(요 4:15–18).
즉 예수님의 팔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생명의 물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는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지혜와 은혜를 따라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권면할 뿐 아니라 명령한다. 그 과정에서 긴장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진리를 말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6)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파수꾼”의 비유 역시 우리의 책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는데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로 죽을 것이나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로 죽을 것이나 너는 네 생명을 건지게 될 것이다”(겔 33:8–9).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
우리는 지혜롭게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술에 취한 사람에게 한 잔 더 권하며 결국 다시 술집으로 돌아가게 돕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의 가치관에 무뎌져 사랑과 죄를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는 말씀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경계를 지우고, 그 결과 교회를 더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 없는 공동체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문화와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노력 속에서 죄를 직면하게 하는 복음을 감정만 위로하는 메시지로 바꾸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와 사랑을 분리하여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은혜’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관점과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려다 결국 성경의 권위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서서히 진행되는 타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변화가 사라진 포용은 결국 영적 무책임이 될 수 있다.
사랑과 진리가 함께 갈 때
필자의 친구는 자신의 변화가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와 정의, 그리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관용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도덕적 분별력을 희미하게 만들며 복음을 단지 심리적 위로의 메시지로 축소시키고, 변화 없는 포용을 강조한다면 기독교는 결국 문화와 구별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