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리처드 하웰 박사의 기고글인 ‘서구 기독교는 ‘선교’에 대해 잘못된 논쟁을 하고 있다'(Western Christianity is having the wrong debate about 'mission')를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리처드 하웰 박사는 케일럽 인스티튜트(Caleb Institute)의 설립자이자 총장이다. 그는 1977년에 설립된 하나님의 복음주의 교회(Evangelical Church of God)의 의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서구 기독교는 지금 ‘선교(mission)’를 두고 엉뚱한 논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방법을 놓고 토론한다. 디지털 사역이 더 중요한가, 소그룹이 더 중요한가. 정치 참여인가, 지역사회 봉사인가. 부흥 집회인가, 사회 정의인가. 그 결과는 피로와 분열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단순하다. 많은 교회가 더 이상 이 기본 질문에 분명하게 답하지 않는다. 누가 우리를 보내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보내는가?
선교는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선교는 교회의 정체성이다. 선교가 하나의 프로그램이 되면, 선택 사항이 된다. 재정이 어려워지거나 갈등이 생기면 가장 먼저 줄일 수 있는 항목이 된다. 그러나 선교가 정체성이라면 포기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존재한다.
사도들이 시작한 자리에서 시작하라
신약의 출발점은 전략이 아니라 사건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주로 삼으셨다(사도행전 2:32–36). 이 고백은 종교적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공개적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다스리고 계시고, 증인이 될 백성을 부르신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무너진다(고린도전서 15:14–17). 다시 말해, 선교는 우리의 불안이나 마케팅, 정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행동에서 시작된다.
초대교회는 기법이 완벽해서 성장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분명한 중심이 있었고,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에 보내진 공동체였기 때문에 성장했다.
선교를 대신하는 두 가지 잘못된 모습
이 중심을 잃으면 선교는 두 가지로 변질된다. 어떤 이들은 선교를 사회운동으로 바꾼다. 교회는 성경 구절이 붙은 시민단체가 되고, 복음은 자신들의 의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다른 이들은 선교를 개인 영성으로 축소한다. 교회는 힐링 공간이 되고, 복음은 불안을 관리하는 수단이 된다.
둘 다 일정한 선은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예수께서 맡기신 사명은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 없는 행동주의는 교회를 이념 시장의 경쟁자로 만든다. 공적 증언 없는 영성은 교회를 개인적 안정을 위한 공간으로 만든다. 결국 교회는 작아진다. 뉴스에 종속되거나, 개인 취향에 갇히게 된다.
브랜딩이 아니라 증언이다
예수는 “이미지를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행전 1:8)라고 하셨다. 증언은 홍보가 아니다. 증언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예수가 누구신지”를 말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증언에는 선포가 포함되지만, 그 선포를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공동체의 삶도 포함된다.
아무리 좋은 문구가 있어도, 교회 안에서 화해와 겸손, 진실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또 하나의 영향력 기술로 여길 것이다.
예배는 오락이 아니라 훈련이다
세계 남반구 교회들은 이 점을 본능적으로 안다. 가난하고 위협받는 곳에서 선교는 부록이 아니라 생존이며 희망이며 진실 고백이다. 그곳에서 예배는 오락이 아니다. 훈련이다.
예배는 우리의 충성을 길러낸다. 무엇을 사랑할지, 무엇을 거부할지를 형성한다. 예배가 소비 경험이 되면 교회는 시장을 닮는다. 예배가 성경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 되면 인내하고 회개하며 용서하고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만들어진다.
성찬은 감상적인 의식이 아니다.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고린도전서 11:26)이다. 십자가와 소망, 공적 진리가 한 문장에 담겨 있다. 교회는 모일 때마다 이 이야기를 반복하며 그 안에서 살도록 훈련받는다.
십자가 모양의 교회만이 신뢰받는다
선교적인 교회는 승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증언에 헌신한다. 강요를 거부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르기 때문이다. 냉소를 거부한다.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는 조작, 스타 문화, 공포에 기초할 수 없다. 그런 방식은 사람을 모을 수는 있어도 복음을 비워 버린다. 교회는 지배하면서 십자가를 전할 수 없다. 멸시를 키우면서 화해를 말할 수 없다. 성공을 위해 거짓을 묵인하면서 진리를 선포할 수 없다.
오늘 교회의 위기는 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도덕적·공동체적 문제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기독교는 참인가?”뿐 아니라 “기독교는 예수 닮은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가?”라고 묻는다.
사도행전 2장은 여전히 설계도다
선교적 교회의 모습은 복잡하지 않다. 말씀에 기초한 가르침, 기도, 공동체, 환대, 나눔, 공적 증언. 완벽이 아니라 신실함, 연출이 아니라 삶의 현존이다.
이런 교회는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를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주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도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말할 수 있다. 자비를 삶으로 실천하기 때문이다.
잔인해지지 않고 거룩을 말할 수 있다. 그 거룩이 십자가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도는 이미 있다
서구 교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선교가 아니다. 되찾아야 할 지도다. 그 지도는 복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 보내시는 그리스도. 이것이 중심이 되면 예배는 상품이 아니라 훈련이 되고, 선교는 부서가 아니라 정체성이 된다. 그리고 교회는 불안에 떨며 버티는 조직이 아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
“예수는 주이시다.” 그리고 그것이 잔리인 것처럼 살아간다. 이것은 기술이 아니다. 회개다. 새로워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