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3–24절에서 인간의 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결국 한 지점에 이른다.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로 머무르지 않는다. 반드시 그 자리에 다른 무엇인가를 앉힌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었다”고 표현한다. 죄란 무(無)가 아니라, 대체(代替)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배하는 존재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인을 맞이한다. 사람, 돈, 권력, 쾌락, 명예, 자연 만물까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대상은 무수하다.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이 우상 금지를 가장 먼저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는 존재인지를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질투 많고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손에 붙잡히거나 형상화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선언은,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분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특정한 이미지나 대상으로 고정하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을 왜곡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도 왜곡된 삶으로 이끌게 된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을 말한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정욕의 지배다. 도덕적 타락, 특히 성적 타락은 단순한 윤리 실패가 아니라 예배의 실패다. 참된 주인을 잃은 인간은 다른 주인을 찾아 욕망을 섬기게 된다. 바알과 맘몬을 좇았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인간의 이야기다.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은 냉정한 방임이 아니라 깊은 슬픔을 품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강제로 사랑하게 만들지 않으신다. 사랑은 자유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끝내 거부할 때, 하나님은 그 선택을 존중하신다. 그 결과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다. 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을 거부당했을 때 나타나는 고통이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먼저 진노를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깊기 때문이다. 사랑이 클수록 거절의 상처도 깊다. 오늘의 묵상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으로 바꾸어 놓았는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의 중심에는 다른 주인이 앉아 있지는 않은가. 썩어질 것으로 영광을 대신할 때 인간은 무너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를 회복할 때, 삶은 다시 질서를 얻고 인간은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