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신학회(회장 이경직)가 1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소재 남서울교회에서 니케아 신경 1700주년 기념 제60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명예교수)가 ‘니케아 신조가 주는 오늘날의 의미’ ▲조병하 박사(백석대 초빙교수)가 ‘니카이아 신앙고백의 역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니케아 신경, 정치 권력과 교회의 신학적 논의 맞물려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
김영한 박사는 “올해는 니케아 신경 공인된 지 1700주년이다. 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um)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이단 사상을 단죄하고, 정통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채택된 신앙 고백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신조는 단 한 번의 회의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후 수십 년간의 신학적 논쟁과 정치적 압력 속에서 56년의 세월을 거쳐 확립된 결실”이라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니케아 신조가 성부와 성자, 성령의 구별성에 대해 명확히 다루지 않았으며, 성령의 신성 문제 또한 당시에는 언급되지 않았다”며 “공의회 말미에 아리우스파에 대한 정죄문을 포함시킴으로써 회의를 마쳤다”고 했다.
그는 또 “니케아 신조는 이후 친아리우스파 황제들의 영향 아래 박해를 받았으나, 362년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온건한 아리우스파와 신학적 제휴를 맺으며 돌파구를 마련했다”며 “375년 즉위한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니케아 정통 신조를 지지하고, 동방의 황제로 임명된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이를 확증하면서 니케아 신조는 정통 기독교 신조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했다.
김 박사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양태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을 극복하며, 아리우스주의뿐 아니라 오리겐주의의 종속론까지 완전히 해소했다”고 했다.
이어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니케아 신경은 325년의 원본이 아니라, 381년 개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조의 성립 과정을 “하늘에서 떨어진 완성품이 아니라, 황제의 정치 권력과 교회의 신학적 논의가 맞물려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라며 “니케아 회의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homoousios)이 확정되면서 정통 그리스도론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 신앙의 인내가 낳은 정통의 결실
김 박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는 단순한 유산이 아니라 56년간 이어진 신학적 논쟁과 정치적 책략, 그리고 신앙인들의 인내 속에서 태어난 열매였다”며 “당시 정통주의자들은 추방과 고문, 투옥, 폭행 등의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고, 그들의 인내와 헌신이 교회의 신조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니케아 신조의 확립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도 있었다”며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한 황제들의 시대를 거치며, 결국 4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니케아 신앙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했다.
◆ 복음적 연합으로 세워진 동일본질 교리
이어 “이 과정에서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 중심이 되어, 아리우스파와의 신학적 대립 속에서도 복음주의적 동맹을 이루어 동일본질 교리를 확립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니케아 이후의 논쟁에서는 성령의 신성이 핵심 쟁점으로 떠올라 삼위일체론 논쟁으로 확대되었다”며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역사적 회의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이 회의에서 성부·성자·성령의 본질적 일치와 위격의 구별이 정통 교리로 선포되었고, 상이본질론과 양태론, 종속설 등 모든 이단이 공식적으로 정죄되었다”고 설명했다.
◆ 열린 보수주의의 길, 오늘의 교회에 주는 교훈
김 박사는 “1996년 창립된 한국개혁신학회가 지난 29년간 ‘열린 보수주의’를 내세우며 걸어온 길은, 니케아 시대의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온건한 아리우스파와 제휴했던 신앙 동맹의 길과 같다”며 “조금 다르다고 이단으로 정죄하기보다 이해하고 설득함으로써 성경적 정통 진리로 인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오늘날 교회는 인내와 관용, 화합과 분별의 정신이 요구된다”며 “정통교리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주류 기독교가 이어받은 중요한 사명”이라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니케아 신조 1700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내와 용서의 정신으로 교회의 연합과 삼위일체 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정통교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아울러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보호하는 울타리이지, 우리를 구원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전했다.
◆ 니카이아회의, 1700년의 신앙적 의미
조병하 박사는 “올해로 1700주년을 맞는 니카이아회의와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며 “니카이아 신앙고백이 1665년 루터교 신학자 요한 베네딕트 카르프초프 1세(Johann Benedikt Carpzov I, 1607~1657)에 의해 비로소 신앙고백 전문으로 구별되었다”고 했다.
이어 “오늘날 독일 루터교회는 예배의식서와 신앙고백을 모은 책들에서 제2차 전(全)그리스도교회의에서 확정된 ‘니카이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을 사용하고 있다”며 “동방정교회 역시 사도신경과 니카이아신경을 염두에 두고 예배에서 이를 낭송한다”고 했다.
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며 공의회의 결정을 신앙의 근거로 삼지만,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해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신앙이 나와야 한다”며 “루터는 교황이 주도한 신앙 항목들이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다. 교황의 간섭이 없었던 325년 니카이아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 431년 에베소회의, 451년 칼케돈회의만이 성경에 기초했다”며 그중에서도 그는 니카이아회의를 가장 중요한 회의로 평가했다.
◆ 교부들의 글로 복원된 역사
조 박사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교부학 연구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고대 교회사와 교리사 연구는 더욱 명확하게 보완되었다”며 “그러나 니카이아회의의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회의록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교부들의 저술과 이후 진행된 삼위일체 논쟁의 문헌을 통해 니카이아회의의 전모가 재구성되고 있다”고 했다.
더불어 “회의에서는 주로 아리우스 논쟁이 중심 의제로 다루어졌으나, 부활절 절기의 통일과 교회의 규율도 함께 논의되었다”며 “제국 분할에 따른 교회 조직 개편, 총대주교의 관할권, 성직자 규율, 공적 참회 제도, 이단 및 분열자들의 재입회 절차, 예배의식 규정 등이 결의되었다”고 했다.
◆ 아리우스 논쟁과 삼위일체 신앙의 확립
그는 “회의는 결국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가 유배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감독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에우세비오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교회로 복귀했다”며 한때 학자들 사이에서는 에우세비오스가 자신의 교회에 보낸 편지 속 신앙고백이 니카이아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한스 리에츠만은 하르낙의 이론을 반박하며 “니카이아 신앙고백은 카이사레이아보다 예루살렘과 안디옥교회의 신앙고백에 가깝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 연구에서는 신앙고백의 기초가 코르도바의 오씨우스(Hosius of Corduba)에 의해 마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며 “회의에서 다양한 신앙고백 자료가 제출되었고, 논쟁과 조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니카이아회의의 핵심 논의, 삼위 중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조 박사는 “니카이아회의의 핵심 논의는 삼위 중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 후임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와의 논쟁 속에서 유배를 겪었으나, 342년경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라는 니카이아 신앙고백의 중심 사상을 재확인했다”며 “이후 350년대 후반 ‘성령 피조설’을 주장한 집단이 등장하면서 성령론 논쟁이 일었고, 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성령도 동일 본질’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했다.
이어 “삼위일체 교리의 표현은 382년 로마회의에 제출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서신에 구체화되었다”며 “독일 신학자 아돌프 마르틴 리터는 이를 “세 위격 안에서 실현되는 한 분의 신적 존재라고 해석했다”고 했다.
더불어 “삼위일체 논쟁이 마무리된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에 대하여」(De Trinitate)에서 persona(인격)의 개념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며 “그는 본질을 뜻하는 substantia 또는 essentia라는 용어를 제시하며 ‘삼위일체를 완전히 설명할 단어는 없으므로 익숙한 용어를 계속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고 했다.
◆ 논쟁 속에 세워진 정통신앙
그는 “회의 당시 감독들은 아리우스파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가 이끄는 중도파, 그리고 알렉산더 감독과 서방 교회 사절들로 나뉘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망 이후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며 “신학적 분파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고 했다. 다음은 네 가지 신학적 분파.
① 아리우스주의와 유사론자들 ②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오스와 앙키라의 바실레이오스가 속한 유사본질론자들 ③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세운 동일본질론자들 ④ 신아리우스주의자들.
끝으로 조 박사는 이러한 논의의 흐름을 통해 “니카이아회의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삼위일체 신앙의 기초를 세운 신앙의 분기점이었다”고 전했다.
이후에는 세션별 강연 순서가 진행됐다. 강연은 ▲김진하 박사(백석대)가 ‘니케아 신조의 56년간의 수용 난제와 해법’ ▲남성현 박사(서울한영대)가 ‘4세기 교회회의를 통해서 본 세 실체 개념의 형성’ ▲조동선 박사(침신대)가 ‘니케아 이전과 니케아에서의 성부 단일 근원성 교리 발전’ ▲조현우 박사(침신대)가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 안에서 호모우시오스의 역할 고찰: 그 의미와 함의’ ▲우병훈 박사(고신대)가 ‘니케야 신경(325)의 아나테마 연구’ ▲권정후 박사(BIS 기독국제학교)가 ‘Classification Difficulty: A Case of Athanasius and Hilary Based upon Their Respective De Synodis’ ▲배정훈 박사(고신대)가 ‘신격화와 자선에 관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사상’이라는 주제로 각각 강연했다.
한편, 이날 한국개혁신학회 제7회 ‘올해의 신학자상’ 시상식도 진행됐다. 시상식엔 이신열 고신대학교 교수와 김영래 서울한영대학교 교수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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