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새 교훈(새로운 가르침)”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과 다른 무엇을 가르치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서 예수님의 전권이 드러나셨다는 것이다(22절과 요 7:46을 비교하라). 물론 “새 교훈”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구약 말씀을 새로운 빛으로 조명하셔서 전통적인 유대교 교사들의 해석과 여러 점에서 다르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과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어떠한 질문이나 논의 없이(참조: 마 8:15; 눅 4:39),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31절). “일으키다”라는 것은 행동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준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새롭게 온전한 건강을 주는 것이오.”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열병이 떠났다.” 마가가 매우 간결하게 보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사본 중에서 본문을 확대해서 이 사건을 은혜롭게 꾸민 사본이 많다. 그러나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마가 스타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당시와 똑같이 행하실 수 있으시다. 만약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병이 그렇게 빨리 낫지 않거나 전혀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영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 마가복음
헤롯왕이 복음서의 많은 부분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로마 황제 카이사르 역시 바울의 글 가운데 여러 구절 속에서 언급되지만 않을 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카이사르는 그 당시 세상의 주(主)였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그 역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 유대인 메시아에 의해서 그의 자리가 넌지시 위협을 받고 도전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을 들고 로마로 온다는 것은, 그리고 이 세상의 왕좌에 다른 사람이 즉위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마치 빨간 코트를 입고 화나기 직전인 황소가 기다리는 투우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이러한 제안은 13:1-7과 긴장 관계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구절에 대한 주해를 참고하라). 바울은 몸을 사리지 않고 이 사명에 헌신하기로 결정했다. 즉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표현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 사람들이 예수를 부끄러워하는 것에 관한 말씀 전승에 대한 암시가 있는 것 같다.
N. T. 라이트 - N. T. 라이트 로마서 주석
예수는 인생의 문제를 풀어준 그리스도다. 인생의 문제란 누구에게 나 다 같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사는 문제가 다 인생의 문제 아닌가. 예수는 그것을 초월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다. 먹는 것을 먹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경제학이다. 입는 것을 입는 것으로 풀어보겠다는 것이 정치다. 먹는 것을 먹는 것으로만 해결하려는 한 필히 싸울 수밖에 없다. 입는 것을 입는 것만으로 풀려고 대드는 한 필히 다툴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경제문제든 정치문제든 사회 혹은 문화문제든 뭐라도 좋다. 문제는 문제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넘어서는 길을 예수께서는 보신 것이다. 넘어서는 길을 예수는 들으신 것이다. 넘어서는 힘을 예수는 가지신 것이다.
장길섭 – 소설 요한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