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대수명이 1년 늘어날 때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평균 4.6%포인트(p) 증가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20년간 가계부채 증가의 대부분이 인구 구조 변화에 따른 결과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김미루 KDI 거시·금융정책연구부 연구위원은 5일 발표한 '인구구조 변화가 가계부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 그는 최근 수년간 가계부채가 꾸준히 증가해 왔음에도 소득 불평등이나 자산 격차가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추세 뒤에는 구조적인 인구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대수명이 1세 증가할 경우 경상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약 4.6%p 상승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또한 청장년층(25~44세) 인구 비중이 1%p 줄고 고령층(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1%p 늘어날 경우, 가계부채 비율은 약 1.8%p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중고령층이 금융자산을 중심으로 자산을 축적하는 공급자 역할을 하고, 청장년층은 이 자금을 차입해 주택 등 자산을 구입하면서 부채를 늘리는 구조와 연관이 있다. 특히 한국은 기대수명이 빠르게 증가한 반면 퇴직 연령은 정체되어 있어 은퇴 이후의 기간이 길어졌고, 이에 따라 고령층의 자산 축적 동기도 강해졌다는 설명이다.
실제 2003년부터 2023년까지 20년간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총 33.8%p 상승했다. 이 중 28.6%p는 기대수명 증가에 따른 것이며, 4.0%p는 연령대별 인구 구성 변화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두 요인을 합치면 전체 상승폭의 약 96%에 달한다.
반면,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순자산 지니계수는 20년간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쳐 가계부채 비율을 1.0%p 높이는 데 그쳤다. 금융건전성 규제는 오히려 가계부채 비율을 2.3%p 낮추는 효과를 보였으나, 전체적인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보고서는 향후 기대수명 증가세가 둔화되고 고령화가 심화됨에 따라 가계부채 비율이 수년 내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70년에는 현재보다 가계부채 비율이 27.6%p 낮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김 연구위원은 "인구구조 변화가 가계부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만큼, 단순히 총량 목표를 설정해 관리하는 방식은 시장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차주의 상환능력과 금융기관의 건전성에 기반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의 예외조항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과도한 정책금융 공급을 조정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