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모든 이들의 하나님으로 다가온다. 또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역은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어야 하기에 이름이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열어 놓으신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기쁜 소식이다. ‘나는 이름이 없다. 나를 부르려거든 야훼라 하라. 그러나 나는 이름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하나님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온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다. 한 부족, 한 지역, 한 가지 사역, 한 시대에 갇혀 있는 신이 아니라 영원히 온 인류의 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신구약 성서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며, 특히 성서적 인간관을 고찰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고백은 인간은 절대 존엄성을 침해받지 않을 존재라는 뜻이다.
임양택 – 네겐트로피
창세기 1장은 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하나님이 사실적인 이 세계를 실제로 창조했다는 이해는 불가능하다. 창세기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몸을 움직여서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하여 창조했다고 하는 기록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이 세계를 실제로 창조했다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기독교가 해야 하는 일은 창세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이다. 창세기를 바르게 읽어내는 데는 지구 생태계에 대한 사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요청되는 것이 인간의 노동이다. 창세기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는 과학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지적설계 이론이나 창조과학은 과학과 화해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의 창세기에 대한 해석에서는 생물학적인 사유와 인간의 노동에 대한 사유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참으로 웃기는 일은 그 이유가 바로 그들이 창세기를 신화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최종천 – 창세기의 진화론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목자는, 우리를 돌보시되 결코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분은 목자이시지만 누구의 돌봄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스스로 영원히 줄어들지 않는 충만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아무리 우리를 돌보셔도 그 충만함은 결코 부족해지지 않는다. 시편 23편은 풍성한 삶을 노래하는 시편이다. 죽음의 슬픔보다 삶의 기쁨을 강조하며, 그 기쁨의 중심에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다”라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그분이 내 곁에 계시기에,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그분이 나의 것이기에, 나는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데이비드 깁슨 - 가장 어두운 순간, 가장 가까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