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조선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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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1927년 7월부터 약 15년간 간행된 동인지 형태의 신앙잡지 '성서조선'은 김교신 등 여섯 신앙 동지들이 조선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성서로 보고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해 행한 성서 연구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 곧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가 성서적인 신앙으로 각성시키려 했던 '성서조선'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많은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등불 같은 역할을 하며 민족혼을 일깨우기도 했다.

'성서조선'은 대부분의 신·구약 성서를 알기 쉽게 해설하는 한편, 조선과 세계의 역사를 성서적 입장에서 관통하는 역사관을 소개했다. 또한 '성서조선'은 일상 속 모습들을 통해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가 하면,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신앙의 제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질타하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조선산 기독교’를 염원했던 김교신을 비롯한 동인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모아진 것이다.

김교신 선생이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은 물론 온갖 허드렛일까지 맡으면서 삶의 전부를 바치다시피 하며 간행된 '성서조선'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들이 발간 당시 한국 교회의 상황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2017년부터 영인본 재간행 작업을 시작했다. 한국 교회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의미를 되새기며 한국 신학 수립의 당위적 과제를 풀어가기 위해서였다. 1982년 노평구(盧平久)가 복사·간행한 '성서조선' 1~158호 전권을 다시 스캔하고, 체제를 약간 바꾸어 연(年) 단위로 2년씩(1권은 3년) 묶었다. 간혹 원본에 페이지 숫자가 잘못 매겨진 곳, 조선총독부 검열에 의해 삭제된 곳 등을 다시 확인하고, 복사·간행한 《성서조선》에 빠져 있던 몇몇 부록 등을 모두 수록했다.

'성서조선' 영인본과 함께 내는 색인집에는 4,400여 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어 있다. '성서조선'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저서 및 그 외 작품명, 사건명 등을 망라하여 연구자나 관심 있는 독자들이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성경 관련 인명과 지명은 부득이 제외했다).

2017년 가을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이사 5명과 책임편집자가 함께 시작하여 1년 남짓 걸린 이 색인 작업은 일반적인 색인 작업과는 다른 과정을 거쳤다. 2년 단위로(1권은 3년) 나누어 분담한 '성서조선' 전권을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며 일일이 색인어를 추려내고, 매달 한 번씩 모여 점검 및 논의를 통해 색인어 선정 및 표기 방법 등에 관해 매뉴얼을 다듬어 가면서 작업했다. ‘외래어 표기법’이 없던 당시에는 서양 인명과 지명의 경우 표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고, 오늘날 쓰지 않는 특이한 한자어[정말(丁抹; 덴마크), 사옹(沙翁: 셰익스피어) 등] 또는 훈민정음의 자음으로 표기된 것들도 있는데, 이들 색인어는 모두 현대식 표기와 함께 나타냈다. 아무리 검색해도 실체가 파악되지 않는 일부 표제어는 현대어에 가까운 발음만 표기하고 어쩔 수 없이 미제(未濟)로 남겨두기도 했다.

2. 편집자가 뽑은 문장

그동안 '성서조선'은 많은 사람들이 구해보려고 애썼지만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완질의 복사판이 간행된 후에는 이를 이용하는 곳이 넓어졌다. 해외에서도 그 수요가 있었다. 특히 신학을 전공하는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런 요구가 컸다. 필자 역시 해외여행을 하는 동안 유학생들의 집에서 '성서조선'을 소장하고 있는 경우를 더러 보았다. 소장한 이유는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에 대한 지도교수와 외국 학생들의 요청 때문이었던 것으로 들었다. 하여튼 각계의 이런 요청에 따라 김교신기념사업회는 이번에 '성서조선'을 다시 간행하기로 했다. …… '성서조선'이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지향해 간 ‘조선산 기독교’를 지향하며 간행된 것이라면, '성서조선'의 복간은 그런 지향(指向)부터 다시 복원하고, 그 지향에 다가서는 것이어야 한다. '성서조선'이 간행할 당시에 요청되었던 ‘조선산 기독교’는 '성서조선'을 복간하는 이 시점에도 같은 공감대에 서 있다. 한국 신학에 바탕한 한국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바로 그 공감대다. 이것이 '성서조선'을 이 시점에 복간하는 진정한 이유다. _이만열, ‘성서조선' 영인본 간행에 부쳐’에서

'성서조선'은 창간호부터 158호에 이르기까지 매월 종간(終刊)의 정신적 자세로 간행되었던 것이다. 글의 한 줄 한 마디가 모두 일본 경찰의 검열을 거쳐야 했는데, 아무리 세심하게 주의하면서 편집하더라도 검열을 거친 원고는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성서조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줄사이(行間)를 읽어 달라는 것이 항상 간절한 부탁이었다. 창간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100년 후에 한 사람의 동지를 얻겠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먼 앞날을 바라보면서 깊고도 순수한 신앙과 건강한 애국심을 가꾸려는 데 심혈을 기울여 '성서조선' 발간을 계속했다. _류달영, ‘끝에 붙이는 말’에서

3. '성서조선'과 김교신 그리고 엮은이

1927년 7월 창간되어 1942년 3월 통권 158호까지 발행되었다.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류석동·양인성 6명이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표어로 창간하였다. 초대 발행인과 편집인은 일본에 있는 류석동과 정상훈이었으나, 1930년 5월호인 제16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이 편집을 비롯한 경비 등 모든 책임을 맡아 펴냈다. 일반적으로 국판 27면 내외였고 발행부수는 가장 많을 때도 300부를 넘지 못하였으나, 고정 독자들 가운데 이승훈 등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많았다.

'성서조선'은 성서 중심의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외치고, 기성 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신앙으로 각성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고정란으로 애국신앙교육을 다룬 ‘권두언’과 여러 인사들과의 만남이나 서신을 기록한 “성조통신”을 두었는데, 특히 성조통신란은 김교신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1942년 3월호 권두언에 실린 “조와(弔蛙)”의 내용이 조선인을 혹한에 살아남은 개구리에 비유하여 조선 민족의 소생을 노래하였다는 이유로 폐간당하였다.

김교신(金敎臣): 1901년 4월 18일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여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박물학을 전공하였다. 1920년 야라이 정 홀리네스교회에서 세례 받고 기독교인이 된 후, 우치무라 간조를 7년간 사사했다. 1927년 귀국 후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될 때까지 발행하는 한편, 함흥영생여고보, 양정중학교, 경기중학교,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기독교 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동인 및 독자들과 함께 검거되어 함석헌, 송두용 등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타계했다. 2010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엮은이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김교신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14년 8월 28일 창립 준비위원회 모임을 시작으로, 그해 11월 28일 창립총회를 거쳐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주요 행사로는 2015년 4월 25일 개최된 김교신 선생 서거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및 강연회를 시작으로 매년 4~5월 추모강연회와 11월 기념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김교신,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 등 ‘김교신 알아가기 시리즈’를 간행하고 있으며, 2016년 10월에는 김교신 선생의 미공개 일기인 '김교신 일보(日步)'를 해역하여 발행하였다. 최근 역점 사업으로 '김교신 전집'을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2018년부터 사단법인으로 전환되었으며,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이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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