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백석대학교대학원 목양동 2층 세미나실에서 개혁주의이론실천학회(샬롬나비·상임회장 김영한 박사) 주최 제10회 샬롬나비 학술대회에서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상생의 신학적 원리와 실제'를 주제로 발표한 웨신대 권문상 교수의 발제논문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I. 서론

▲권문상 교수ㅣ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한국의 대형교회와 소형교회는 각기 성경적인 교회상과 신학적 기초에 충실한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각 형태의 한국 교회가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사이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 의식을 갖고 있는지 회의적이어서이다. 물론 이 두 가지의 문제제기는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한국 교회 전체가 도덕적 무감각과 양심적 무정부 상태에 이르러 사회적 이지메를 자초한 면이 있게 된 이유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 이유 중, 한국 교회들 자체 안에 특히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사이의 자본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과도한 경쟁이 큰 몫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뢰도 하락의 경우에는 이 글에서는 지면상 논의를 유보하고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사이의 긴장관계의 경우에만 주목하여 이 문제의 심각성과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은, 대형교회가 갖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오늘날 상업주의로 무장된 한국의 대형교회의 존재 그 자체가 소형교회에게는 자괴감과 패배의식을 제공하고 있음이 상당하다는 면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기반성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사이의 유기체적 관계는 성경적 원리여서 소형교회의 아픔을 진정성있게 대형교회가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교회로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형교회라고해서 무결점을 보장하지도 않고 유일한 참된 교회 구조라고 선언할 수도 없다. 한국교회의 신뢰도 하락이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것에는 소형교회라고 면책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상생할 수 있는 신학적 원리와 실제에 주목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교회론의 근본 원리를 신론적 기초에서 찾을 것이고, 이후 한국의 교회에는 이러한 신학적 타당한 근거보다는 문화적 원리에 기초하여왔음을 분석하고, 사회학적 공동체 개념에 입각하여 한국 교회의 반공동체적 특징을 비판한다. 이후에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현존과 두 형태의 교회가 상생보다는 경쟁의 관계를 지속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며, 끝으로 두 형태의 교회가 상생할 수 있는 실제를 제안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내재적 원리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주 그리고 교회의 현실적 형식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적 삶으로서의 교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사이의 과도한 긴장 관계는 모두, 교회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원리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오히려 우리 문화가 갖고 있는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결과이거나 최근 수십 년 간 한국 특유의 압축성장과 대기업 중심의 시장경제 원리의 영향을 받은 신자유주의적 교회성장주의 행동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비판적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 글에서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교회에 관한 성경적-신학적 본질을 되찾고 공동체적 교회로 거듭날 것을 제안할 것이며, 아울러 그것의 구체적 방안을 덧붙일 것이다.

II.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 사이에 상호의존적 유기체적 존재이다. 같은 원리로 각 교회들은 전체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 의식을 갖는 상호의존적 유기체이다.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갖는 심오한 원리를 하나님의 내재적-경륜적 실존에서 발견한다. 다만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을 논의하면서 동, 서방의 삼위일체론적 논쟁을 부각시키는 것은 자제하고, 양쪽의 기여도를 중심으로 교회론적 적용에 집중하기로 한다.

(1) 삼위일체 유비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의 모형이라는 것은 성경적-신학적 근거에 기초한다. 물론 성경에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물론 그 내용도 단정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통신학은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하나님의 활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을 담고 있음을 잘 발전시켜왔다. 대표적으로,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요 17:22) 해달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 성도들과 교회들이 하나 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이 그 모범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른 교회론은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틀 안에서 정립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를 반영하며, 교회의 실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얼굴인 것이다. 교회론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제시하여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동, 서방의 교부 신학은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정통 삼위일체론이 제기하는 바는 삼위 하나님의 구별과 유기적 통일을 지지하는 것이다. 서방적 삼위일체론이 하나의 하나님 안에서 삼위의 실재를 보려했다면, 동방적 삼위일체론이 삼위의 실재 안에서 하나의 하나님을 구성하려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전자의 경우 각 위의 하나님이 갖는 신성을 하나의 하나님에게서 찾음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온전한 하나님으로 계셔서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고 삼위 하나님이 각기 구별되는 것은 속성이나 실체가 아닌 상호 관계의 구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아가 삼위 중 두 개의 위의 합이 나머지 하나의 위보다 크지 않고 각 위는 전체의 하나님과 같다. 그래서 서방 정통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어거스틴은 아리우스처럼 종속론적 삼위 구분과 구별을 멀리함은 물론 사벨리우스와 달리 삼위의 구별을 객관적 차원에서 제시하되 본질이 아닌 관계의 구별임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서방적 삼위일체론이 성경이 제시하는 바 실제적 삼위의 구별을 제시하는지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관계의 구별이라도 그 구별은 하나 된 본질 안에서의 "존재 방식" 또는 "존재 양식"의 구별이지 실제적 구별은 아닌 것이다. 마치 "쫙 벌린 손바닥이 움켜진 주먹과 다르듯이" 삼위 구별은 명시적이지 않다. 어거스틴의 심리적 유비는 이를 잘 증명한다. 마음, 지식, 사랑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만 어거스틴의 De Trinitate를 영역한 쉐드(William G. T. Shedd)가 평가했듯이 실제로는 마음만 실체이고 나머지는 마음의 작용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서방의 삼위일체론에서 교회론적 기초를 찾을 수 있다면 각 교회의 본질은 대형, 중형, 소형의 크기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거룩한' 그리스도께 속한 곳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은 피차 각 교회 안에서 수장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당연히 각 교회에 대한 서로간의 존중과 인정을 전제로 하여 소통하고 관계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각 교회들은 자존감을 갖고 다른 교회와 비교하거나 상대적 열등감이나 우월의식을 갖지 않게 한다. 특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됨은 곧 각 교회들이 지역과 교파를 달리하지만 하나의 '그리스도 몸'이라는 본질을 공유하므로 하나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서방적 삼위일체론의 약점이 반영하듯이 이를 교회에 적용할 경우, 각 교회가 고유성, 개별성, 자율성을 얼마나 보장하게 해주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각 위의 고유한 실체가 삼위 사이의 구별을 이루게 하기 보다는 성부 없는 성자, 성자 없는 성부가 없다는 방식의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론적 측면에만 머물지, 각기 고유한 실체 사이의 호혜적 관계를 제시하지는 않다. 각 위의 자유와 독자 의식, 상호 평등 의식을 전제한 삼위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가 확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방적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라칭거(Joseph Ratzinger,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교회론은 볼프가 잘 간파한 바와 같이 교회의 위계적 구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회적 구조를 하나님의 유일한 실체를 통해서 파악하는 것은 라칭거의 (대략적인) 삼위일체적 사유에 보다 부합한다. 외부적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신적 실체는 하나의 교회와 상응하는데,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하나의 주체를 구성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이 가능하게 된다. 교회의 일원론적 구조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교회 안에서 주체로 작용하는 한 분 그리스도는 교회의 하나뿐인 가시적 머리, 즉 보편 교회의 머리인 교황에 의해서, 그리고 지역 교회의 머리인 주교에 의해서 대표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교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교황과 하나의 주교만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통한 구조적 요로로서 근거 지어질 수 있다.

라칭거가 교회를 이러한 전체의 관점에서, 즉 교회를 하나의 주체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개별 주교들과 회중 구성원들(또는 사제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교황과 주교들 사이의 관계까지도 필연적으로 위계적으로 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라칭거의 교회론은 서방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교회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각 위의 독특성과 자율을 보장하는 데 한계를 노정시키고 있으며, 이에 기초한 교회는 관계를 통해 자아 형성하되 그것은 관계없는 개별 교회와 교인은 실제로 교회와 교인이 아니게 될 수도 있게 만드는 위험을 안게 만든다. 교회 안의 모든 구성원 사이의 관계는 상대의 고유성과 특권을 향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순수한 관계로서의 인격은 '어느 곳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다른 이들에 대해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비록 처음에는 순수한 관계성 자체가 관계들의 위계적 구조를 상대화시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은 위계의 힘에 자유재량을 제공할 뿐이다."

반면에 갑바도기아 교부들로(Basil the Great, Gregory of Nazianzus, Gregory of Nyssa) 대표되는 동방적 삼위일체론에서는, 서방에서 각 위의 역할을 암시할 수밖에 없는 페르소나(persona)로 명명한 것과 달리, 각 위를 고유한 인격의 소유자를 의미하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로 명명하여, 각 위의 실체 안에서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을 이루는지에 논의의 초점을 두었다. 물론 각 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되 독립적이지 않으며, 사랑 안에서 삼위는 하나의 속성만을 가지고 본체 안에서 상호의존적 하나를 이룬다. 이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성부에게서 기원하게 함으로써 각 위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볼프가 동방 교부를 따르는 지지울라스의 삼위일체론을 읽으면서 잘 판단한 바와 같이 왜 하필 성부의 군주성이 하나의 하나님을 유지케 하는데 필수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시된다.

우리는 동방적 삼위일체론에서 교회에 대한 모형을 구성할 때, 서방에서보다는 각 교회의 동등하고 고유한 실체로서의 구조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사이의 평등하고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격체를 보다 더 실제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성도들과 각 교회들은 상호 간에 위계적 관계보다는 대등한 관계로서 피차 존중할 수밖에 없도록 규정된다. 대형, 중형, 소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교회들은 상호 온전한 교회로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아울러 각 교회들은 본질상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각각의 교회 안에서 주를 머리로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논리적으로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의존적 하나를 만들게 한다.

하여튼 동방이든 서방이든 삼위일체론 전개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것은 '단일신론'이었다.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상호 동등한 신성을 지닌 삼위의 실제를 구성하지 않게 하는 역동적 단일신론이라든지, 삼위의 실제적 구별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든지, 이 둘 모두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다신론에서와 같이 상호 위계적 구조를 지닌 종속론적 혹은 삼신론적 하나님 이해도 거부의 대상이었다. 이것 역시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동서방의 정통 삼위일체론에서 부정하려한 이 노력을 교회론적 구조로 해석할 때, 우리는 참된 교회란 여러 개의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위계적 구조를 배격한다는 점이고, 하나의 교회가 있지만 그것은 여러 개의 수많은 교회들의 고유성과 개체성을 부정하거나 교회 사이의 평등성을 저해하는 교회론도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고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적 정통 신학 이해는 유기적 실체를 구성하는 공동체적 교회론의 기초가 된다.

(2) 신론적-공동체적 교회론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 상호의존적, 상부상조의 '연합된 하나'(united one)를 의미한다. 실제로 하나님은 하나라고 할 때, 그것은 창 1:26-27의 "우리의 모양을 따라 우리의 형상대로"와 신 6:4의 "하나인 여호와"를 종합적으로 보되, 후자의 '하나'와 창 '2:24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이라고 할 때의 '하나'가 같은 히브리어 '에하드'라고 명명되었음을 고려할 때, 그 '하나'는 숫자적 하나가(one) 아닌 내용상 '하나' 곧 '연합된 하나'(united one)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연합된 하나의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의 모형이 된다고 할 때, 군주론적, 단일신론적, 삼신론적 교회, 즉 하나의 대형교회가 교단 위에 군림한다든지, 각 교회들이 경쟁적 교회성장에 몰입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요 17:22)해달라는 주님의 유언적 기도를 짓밟는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바울의 몸 사상에서와 같이 지체의식을 갖는 것을 전제한다(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하나이지만 다수이며, 다수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서방 교부들이 발전시킨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인 것이다.

하나님은 각기 자유로운 존재이며 독자적 의식 소유하고 있고, 각 위는 고유성을 향유한다. 하지만 이는 곧 삼위 하나님이 이기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상호 동등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또한 서로 의존하며 상호 신뢰하는 분으로서, 서로를 배타적으로 지배한다든지, 스스로 고립되지 않으신다. 서로를 필요로 하기에 성자 없는 성부, 성부 없는 성자의 존재가 불가능하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사벨리우스적 신론적 교회론을 가정할 때,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존재와 삶을 전체주의적으로 생각하듯이 교회의 전체주의적 구조, 독재적 권위주의, 전제적 폭군, 심지어 사교집단과 같이 생각될 수 없다. 이런 유형의 교회를 극단적으로 들면 외형상 '지점' 교회들이다. 회사의 본점과 지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형태가 그것이다. 그런데 만일 삼위 하나님 각 위의 자유가 삼위 사이의 관계에 우선시하면 삼신론과 다신론으로 인식되는데, 이에 따른 교회는 '나홀로주의'만 중시하는 사회학적 자유주의 교회이다. 대형교회가 갖는 유혹을 이러한 형태의 교회에서 발견하게 된다. 지역 혹은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단, 나아가 한국 교회 전체의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이런 반삼위일체론 형식의 교회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통 교회가 아님은 물론이다. 교회는 다시 말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같이 '더불어'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삼위 각 위 하나님이 온전하듯이, 그래서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을 반영하듯이, 한국 교회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 교회들은 바로 그 한국 교회 전체의 얼굴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모두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두는 각자 한국교회의 대표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진 교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관계적 존재로 계시듯이 교회들은 관계적 존재이다. 이 관계 안에서 고유함을 즐기고, 참 자유를 누린다. 여기서 삼위 하나님도 그렇지만 각 교회들은 상호 무한한 신뢰의 관계를 전제한다. 비록 교회가 특수하게 존재하지만 서로에게서 독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고유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 각각의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구별하여 생각할 때 반드시 상호내주적(페리코레시스적)으로 하나를 바라보아야 하고, 일체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반드시 고유한 각각의 인격적인 존재의 하나님을 동시에 생각해야한다. 칼빈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다음의 말을 즐겨하였다: 삼위 하나님을 보면서 즉각 일체되신 하나님을 생각하여야 하고, 하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즉각 삼위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정통 교회론은 바로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공동체 교회를 의미한다. 각 교회들은 고유성을 확보하는 순간 즉시 하나의 전체 교회, 그것이 지역 노회이든 총회든, 교단이든 한국교회 전체든지, 그리스도가 주되시는 전체의 교회를 보아야 한다. 각 교회는 머리되시는 주와 하나님과 영적인 친밀도를 높여 주의 영광을 돌리되, 지역과 교단, 한국교회 전체의 공적 위치와 그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에 민감해야 참 교회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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