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금융시장에 돈 흐름이 경색되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은 무제한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며 유로존(유로화 사용국) 재정 위기를 진화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유럽 금융시장에서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금융기관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고, 유럽 금융 시스템이 지나치게 ECB 의존적인 상황에서 ECB 내부의 불화설까지 일고 있어 ECB의 역량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 12일 "각 중앙은행은 필요할 경우 언제든 단기 자금을 은행들에 공급할 태세가 돼 있고, 특히 ECB는 자금을 고정금리로 무제한 공급할 능력이 있다"고 강조했지만, 이날 유럽 주요국 증시가 3∼4% 폭락하며 전주의 `검은 월요일'을 재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 엑스페리 파이낸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캐시 맨소리는 "유럽 금융 시장에 심리적인 두려움이 팽배한 상황에서 유럽은행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상황과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유럽 은행서 자금 이탈 `러시' = 유럽 은행들의 보유 잔고가 급격히 줄고 있는 것이 당장 급한 불이다.

   그리스 은행들에 금융 기관들이 예치한 잔고가 작년 연초 이래 3분의 1 가량 줄었다. 독일 은행들에서도 같은 기간 금융기관들의 잔고는 12% 감소했고, 2008년 9월 이후로는 24% 줄었다. 프랑스 은행들에서는 작년 6월 이후 6%, 스페인은 작년 5월 이후 15% 각각 감소했다. 이탈리아 은행들에서는 지난 1년간 금융기관들의 예금 인출이 무려 1천억 달러를 넘었다.

   유럽 금융기관들이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예금 인출 사태를 부추기는 형국이다.

   이러한 여파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RB)에 맡긴 외국인 자금은 지난 2월말 4천430억달러에서 현재 9천79억달러로 두 배로 늘어났다.

   해외 자금의 유럽은행 탈출 러시도 가속화하고 있다.

   포르투갈에서 은행들이 금리를 계속해서 올리고 있지만, 지난 1년간 외국인들의 잔고는 19% 감소했다. 특히 미국 머니마켓 펀드들의 탈(脫) 유럽 현상이 눈에 띈다.

   미국 금융회사들이 운영하는 머니 마켓 펀드는 지난 1년간 독일, 프랑스, 영국 은행들에 투자한 자금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이탈리아와 스페인 은행들에 대한 신규 투자는 전면 중단한 상태다.

   피치 레이팅스의 시장조사에 따르면 미국 머니 마켓 펀드들은 유로존 재정위기가 재부상한 지난 5월말부터 7월 사이에 유럽 은행에 대한 자금 공급을 20% 줄였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대한 융자는 97% 삭감했으며, 독일과 프랑스 은행들에도 이 기간 각각 42%와 18% 축소했다.

   ◇유럽은행들의 지나친 ECB 의존 = 유로존 체제의 위험이 큰 것은 유럽은행들이 기댈 곳이 ECB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유럽은행들은 자금 유치를 위해 예금 금리를 높이면서 수익률이 악화되고 있고 적자가 불어나면 ECB에 손을 내미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난 7월과 8월 두 달사이 평소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850억 유로를 ECB로부터 융자받았고, 그리스와 아일랜드 은행들은 8월 한달에만 각각 1천억원을 ECB로부터 빌렸다. 또 포르투갈 은행들과 스페인 은행들은 7월에 각각 460억 유로와 520억 유로를 ECB로부터 지원받았다.

   미국 기업협회의 데스몬드 래치맨은 "ECB가 유럽은행들에 대출해주는 대가로 해당 국가의 채권을 담보로 받고 있지만, 만약 해당 국가들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다면 담보들은 휴짓조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ECB와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이 유로존 은행들에 융자한 규모가 유로존 금융 시스템 자산의 7배에 해당되는 엄청난 규모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는 트리셰 ECB 총재가 지난 12일 "ECB가 1.7∼1.8조 유로 상당의 담보를 갖고 있으며, 시중 은행들의 대차대조표 상에도 별도로 4∼조 유로 상당의 담보가 있다"고 강조한 것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유럽내 불화설로 ECB 신속 대처 어려워 = ECB의 소방수 역할에 대한 의심이 드는 데에는 내부의 불화설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불화설은 인플레이션 억제에 역점을 둬온 위르겐 슈타르크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집행위원회 이사가 지난 9일 돌연 사임의사를 밝히면서 수면위로 급부상했다.

   트리셰 총재가 `무제한 유동성 공급'을 밝혔지만, 현 이사진 내부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향후 닥칠 인플레이션에 대해 우려하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슈타르크의 사임 발표후 닷새가 지난 14일 옌스 바이드만 ECB 잽행위원회 위원이 "ECB가 대차대조표상의 위험을 줄여야 한다"며 유럽은행들에 대한 유동성 공급 정책에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독일 분데스방크의 총재인 그는 "현재 중앙은행들이 곤경에 처한 은행들과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올해 회계 정책을 완화하고 있다"며 "유로화 시스템의 대차대조표는 상당한 위험을 쌓고 있다"고 경고했다.

   ECB의 한계가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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