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그런데 예정론의 문제를 다룰 때 항상 제기되는 두 상반된 영역의 대립 혹은 마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예정론을 반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노예적 의지일 뿐이라고 논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정론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그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결정권은 없고 시키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노예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조화된 관계는 매우 풀기 어려운 문제이며 영원한 신비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를 무시하거나 삭제할 수 없이 동일하게 강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둘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데 정작 이 둘이 어떻게 조화되는지 확실하게 계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예수님이 천국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 천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며 어떤 형태인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살며, 무엇을 하고 살며, 어디서 거주하며 사는지 등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저 상징적이고 묵시적인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 대해 로레인 보에트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거대한 성전을 지탱하고 있는 두 쌍둥이 평행 기둥과 같다. 이 두 쌍둥이 기둥은 인간의 시력 안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구름 위에선 다시 만난다.”

이것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조화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선 해결할 수 있는 신비에 속하는 일임을 증거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계시하시고 묘사하신 것을 어렴풋이나마 그림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나무그림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구원의 나무의 뿌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예정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 뿌리에서 두 나무줄기가 생겨나는데 하나는 ‘선택’(택함받음)의 줄기요 하나는 ‘유기’(버림받음)의 줄기입니다. 신학에서는 이 두 나무줄기를 일러 ‘이중예정’이라 부릅니다. 모든 열매들은 이 줄기에서 자라난 가지의 잎으로부터 열리고 맺힙니다. 선택의 가지에서는 구원의 열매, 즉 알곡들이 맺어지고 유기의 가지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 쭉정이들이 달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구원 나무의 실체입니다. 이 구원 나무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답 이외에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선택과 유기라는 구원의 예정이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기인한 절대적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금도 훼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꼭두각시나 로봇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구원하시며, 그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선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대립적 요소들을 두고 교회사에선 오직 인간의 의지와 책임과 능력을 강조하는 무리가 있었고 지금도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성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결정에 따른 구원론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결정에 따라 인간을 구원시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은 사전에 아무런 계획이나 결정을 하지 않으시고 한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적 능력으로 선택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이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도 올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하나님이 조종하는 로봇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닙니다.

그래도 “둘이 과연 어떻게 조화하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즉, 두 대립되고 모순되고 반대되는 주장을 어떻게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순으로 보이는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의 문을 열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답을 말합니다. 그런 증거들이 수두룩합니다. 가령, 요셉과 그 형제들을 보세요. 그들은 각각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 언약(창 15:12~21)을 하실 때의 그 예정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창 42:21, 45:3). 애굽의 바로 왕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시고 그 마음을 선용하시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도록 사용하셨습니다(출 9:16). 바사 왕 고레스도 자신의 자유의지적 결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귀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정하시고 예언된 일의 성취였습니다(스 1:1~3).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떻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확실히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과정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자유의지는 충분히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 자발적인 결단으로 나타났습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자유의지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보호받고 인도받는 범위 안에서 허가된 독립된 자유의지”입니다. 이 두 부조화를 하나님은 하나로 조화시킬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며, 모순이 없으시며,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이십니다. 개혁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의 설명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이 역설이 가지는 동전의 양면을 함께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바로 대할 수 있다.”

(저는 이것을 ‘내비게이션 법칙’이라 부릅니다. 모든 운전자는 가는 길에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안내를 받습니다. 그런데 운전자 생각에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잘 따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운전자는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손치 않는 범위에서 기어이 예정된 목적지로 이끄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예정론의 논쟁점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두 문제를 다룰 때 항상 유념할 것은 ‘주권의 우선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행사되는 것임을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압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공로가 앞장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인정되나 그 공로의 가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주권적 역사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조화되고 하나가 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성경을 쓰신 과정을 통해 자세히 나타나고 실증됩니다. 즉, 성경은 최상의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의 말입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기에 인간의 손으로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모든 신비로운 현상을 ‘성령의 영감’(inspiration)이라 부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다른 두 쌍둥이 기둥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할 때 많은 인간 저자들을 활용하셨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것입니다. 이때 기록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마음껏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기록할 때 하나님은 그대로 기록자의 개성과 특성들을 무시하거나 변경하지 않으신 채 당신의 말씀을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와중에서 기록하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바로 이 신비로움 때문에 저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대하고 그 경이로움에 감탄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되고 인간의 지식으로 충분히 조화되어지는 하나님이라면 정말로 그분은 매력을 잃은 하나님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의 신비한 일들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나님 알기를 애씁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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