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대한민국의 건국과정과 기독교(대한민국의 탄생)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해방은 한반도가 개항이후 꿈 꾸었던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생각은 1882년 조미조약에서 기원되고, 1919년 3.1 운동에서 확인되었지만 우리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다음에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새웠다.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미, 영, 중, 소의 공동신탁통치였다. 미국은 처음부터 한반도가 동북아의 전쟁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를 누구도 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미국 주도의 공동신탁통치를 통하여 한반도를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 세계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소련은 이것을 얄타회담에서 수용하였다. 종전을 앞둔 미국과 소련의 약속은 공동신탁통치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38선 이북과 이남의 군사주둔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런 공동신탁통치 원칙을 부정하고, 무장해제를 위한 38선을 실질적인 국경선으로 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종전 후 하지에게 8월 하순 경에 내린 첫 번째 명령에서 “국무성으로서는 민간행정업무가 일본군의 항복이 종료된 후에 현실적이 되며, 그 때 까지는 민간행정업무는 통합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한국이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행정구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련은 9월 21일 스탈린의 지령에서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38선을 분단선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소련이었다는 것이며, 미국은 이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38선의 철폐를 위해 소련에 양보해서 김규식, 여운형과 같은 중간파를 내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은 한반도에 친소정권을 세우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주도의 동북아 질서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 소련이 내세운 것은 선정부수립(인민정권), 후 공동신탁통치(통일)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모스크바 외상회의였다. 하지만 미국은 1, 2차 미소공위를 통하여 소련이 한반도에 친소정부를 만들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대소협력체제를 봉쇄전략으로 전환하고, 미소공위를 해산하고, 이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의 운명은 미소공위에서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대한민국은 바로 유엔의 결의에 의해서 탄생되었다.

해방 이후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한반도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런 미국주도의 국제질서를 환영하였다. 특별히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진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한반도가 미국주도의 국제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은 연합국원수들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먼저 스탈린에게는 “통일민주독립한국은 소련과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의 보증”이 될 것이라고 하여, 한편으로는 통일민주독립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소련에 유화적 제스쳐를 보냈다. 영국의 애틀리에게는 소련이 한반도를 또 하나의 폴란드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중국과 함께 “통일민주독립한국”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장개석에게 국제사회가 한국을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투르만에게 이것을 승인하지 말라고 전보를 보내줄 것과 “통일민주독립한국”은 중국의 신실한 동맹이 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투르만에게 한국민은 한반도의 분열을 가져올 공동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오히려 미국의 단독점령과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아울러서 수많은 미국인들이 전쟁에서 희생한 이유는 한국을 민주국가로 만들어서 극동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하나의 독립민주국가로서의 한국의 미래는 미국 대통령 당신의 손에 달려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이승만은 우리민족은 미국주도의 자유민주국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런 한반도는 극동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해방의 종교적 의미도 이해해야 한다.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바로 일본인들의 신사였다. 이것은 해방이 일본의 정치에서 해방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전쟁 직후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문에는 연합국의 점령목적이 카이로선언에 나타난 자유와 독립을 이루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하는데 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중국의 임시정부도 8월 31일 중경의 미국대사관을 찾아가서 자신들이 신봉하는 것은 “미국식 입헌주의”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미군정과 협력하여 새로운 나라를 이끌고 가고 싶다고 주장했다. 아울러서 임시정부의 많은 인사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현재 북한지역에 공산주의자들이 진주하고 있으며, 이곳에 미국선교사들을 즉각 파송하여 그들의 위협에서 북한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미군의 보고서에도 미군이 조선에서 활동하는데 있어서 조선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계속)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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