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영 설교]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행 16:27-34)

교회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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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학술원 제56회 월례발표회 경건회 설교
희망을 노래하는 교회 정기영 목사.

몇 해 전에 미국 한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 한인들이 모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 사건은 빚에 시달리던 뉴욕의 한인 남성이 추석 이튿날 아내와 10대 아들을 살해하고 방화 후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들은 뉴욕 명문 과학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이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을까요? 왜 자살할 때 가족까지 살해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가정이 어렵다고, 자기 삶이 어렵다고 가족 전체를 해(害)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일을 종종 행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심리학자들은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평소에 하지 않았던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비이성적인 상황에 스스로 빠진다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두려움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을 벗어나는 두려움에 빠지면 마치 수수깡으로 지은 집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면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인간의 두려움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고 믿고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아담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분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두려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렸을 때, 연탄재를 깨서 벽에 던지고 놀다가, 이웃집 유리창을 깬 적이 있습니다. 너무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집에 도망가서는 다시는 집 밖에 나오기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다 말씀 드리자, 어머니께서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큰 두려움이요, 문제였는데 어머니에게는 문제도 아니었던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두려움은 하나님에게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려움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인생의 문제로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이 죄 때문에 생긴 두려움은 아닙니까? 그것이 혹시 하나님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두려움은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모든 삶의 두려움을 이기고, 이 땅에서 영적 승리자로 살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그런 승리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은혜를 구함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행16:30)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날 밤, 사도 바울과 실라는 그 어두운 감옥에서 원망과 탄식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면서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때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잠을 자다가 깼습니다. 보니까, 감옥 문들이 열려있습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칼을 빼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죄수들이 도망가면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하고, 그 가족들은 노예가 됩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간수는 혹시 죄수들이 탈옥하지나 않을까 날마다 근심하며 고민하면서 감옥을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휩싸여 자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도 바울이 소리를 지릅니다. "멈추시오! 우리는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소이다! 칼을 거두시오!" 그러자 간수가 등불을 가져와 사도 바울과 실라의 얼굴을 비추어 봅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본 간수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앞에 엎드려 울면서 간구합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이 모든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사도 바울이 외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는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그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34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존재가 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기쁨의 시작, 구원의 시작,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작은 바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와 같이 우리는 삶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인생의 해답을 하나님에게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해답을 하나님께 찾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때 와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존심 때문에 못하고, 자기 생각 때문에 못하고, 믿음이 없어서 못하고, 영적인 교만으로 인해 못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합니까? 머리로 경험합니까? 입으로 경험합니까? 아닙니다. 무릎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을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두 명의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 오면서 간절히 간구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모른 체 하시며 그냥 지나가십니다. 그리고는 어떤 집에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그러자 그 맹인들이 앞이 보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집을 찾아 따라 들어 와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합니다. "주님 저희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러자 맹인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대답합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예수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눈을 만져주신 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자 그 순간 두 맹인의 눈이 치유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수많은 맹인들이 있었습니다.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아와 은혜를 구한 이 두 맹인만이 치유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구원의 감격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주님을 찾아야 하고, 또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영적인 병자입니다. 나는 무능한 자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부르짖으십시오.

1967년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에서 탄광에 사람이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때, 현장에서 구조 실황을 생생하게 중계해서 국내 뉴스 앵커 1호가 되신 분이 김찬식 집사님입니다. 이 분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는 하였으나 분명한 믿음과 체험은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는 나이롱 집사로 교회를 섬겼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중증 인후염과 당뇨병으로 방송을 더할 수 없었습니다. 95년 봄부터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찾다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할 수 있는 기도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표현 할 수 없는 기쁨이 마음에 충만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하려는데 그 순간 막혔던 목이 뻥 뚫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김찬식 집사님이 이렇게 간증합니다. "이제 저는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후염과 당뇨병이라는 사랑의 채찍을 드신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랐더라면 저는 계속 고통의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 분이 뭐라고 간증했습니까? 자신의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간증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할 수 있는 간증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간구하자,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합니까?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시작입니다. 또 반드시 해야 할 신앙의 내용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긍휼히 여겨주소서!" 이렇게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품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을 경험하면 두려움이 떠나가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하고"(행16:31)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것이 살길이요, 그것이 인생의 축복이요,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보다 크신 그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공로와 능력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외길인데,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 뭐라고 하십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또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다시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잘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

저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왜요? 그 자격 없는 사람이 바로 나고, 저는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면 이 강단에 설수가 없는 사람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이 강단에 서 있는 것이지, 제가 잘나서, 제가 여러분 보다 더 많이 배워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까? 오직 십자가를 의지할 때입니다.

두려움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말 못할 죄가 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부끄럽습니까? 그렇다면 나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잡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비록 부족하여도 두 팔 벌려 나를 받아 주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두려움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어 맡김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16:33)

복음을 들은 간수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4절을 보세요.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자 두려움은 온데간데없고 기쁨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의 의미는 먼저 죄 씻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죽음'입니다. 즉, 나는 물 아래에서 죽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옛사람이 죽고 없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 옛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힘으로, 자기 고집으로,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새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인생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 간수가 그렇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결단했을 때,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을 주, 즉 주인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주님이란 '주인님'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의 주인님입니까? "나와 내 인생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도우미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생명과 삶과 인생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을 주권적으로 붙잡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내가 하려고 하고, 내가 풀어 보려고 하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멀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두려움이 임하게 되고, 두려우니까 더 잘못된 길로 가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고,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진실하게 맡기십시오! 그래서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 작가 중에 히윗 여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불량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폭행을 당해서 척추가 손상당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7개월 동안 꼼짝 못하고 치료를 받게 되었고, 치료 후에서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원망과 절망과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흑인 여자가 병실을 청소하는데, 콧노래를 부르면서 청소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히윗 여사는 그 콧노래가 너무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 흑인 여자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끄러워요! 뭐가 좋아서 노래에요?" 그러자 그 흑인 여자가 히윗 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좋지요. 나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찬송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니까요" 그 한 마디에 히윗 여사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가난한 흑인 여자는 청소 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뻐하고 감사하는데, 나는 그깟 사고하나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살았구나. 내 믿음의 수준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구나.' 그래서 그 순간 울면서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그 때, 마음속에서 찬송시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 시를 가지고 찬송을 만듭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녀는 그 때부터 이 찬송을 부르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겠다고 결단하고 결단합니다. 그 날부터 영적으로 깊은 기쁨이 경험되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척추가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히윗 여사는 자신을 폭행한 그 학생을 찾아가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공립학교에서 일하면서 평생 청소년들을 교화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바칩니다. 맡김이 능력입니다. 그 때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있습니까? 근심 걱정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가십시오. 그래서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글=기독교학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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