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해 한국의 반도체 생산시설이 타격을 받으면 세계 경제가 첫해에만 4조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경고가 미국 언론을 통해 제기됐다. 한국에 집중된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릴 경우 인공지능(AI) 산업은 물론 전자제품 생산 전반으로 충격이 번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27일(현지시간) “한반도는 경제적 화약고이며, 충돌이 발생하면 수조 달러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취지의 기고를 게재했다. 필자인 댄 블루멘탈 미국기업연구소(AEI)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군사적 역량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미 양국이 공동 대응 의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반도체 생산 비중에 주목하며 한반도를 “세계 경제의 숨겨진 병목”으로 표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가속기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의 거의 3분의 2를 공급하는 만큼, 한국에서 발생한 생산 차질이 세계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평택의 대규모 반도체 단지를 비롯한 주요 생산시설이 북한의 공격 사정권 안에 있다고 지적했다. 데이터센터 건설 확대로 평시에도 메모리 반도체 부족 현상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무력 충돌까지 겹치면 공급 충격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생산시설 해외 이전,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어”
기고는 한국의 반도체 생산시설을 해외로 옮기는 방안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최첨단 공장 하나를 건설하는 데 수백억 달러가 들 수 있고, 설비를 갖춘 뒤 생산능력을 충분히 확보하기까지도 수년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십 년간 축적한 기술과 조직 차원의 경험, 전문인력 역시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려운 요소로 꼽았다. 생산시설의 지리적 분산만으로 한반도의 안보 위험을 해소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블루멘탈 연구원은 북한의 대외 여건에 대해 “냉전 이후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북한이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약 1만4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으며, 이들이 전장에서 얻은 경험을 북한군에 축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가 그 대가로 북한에 방공체계와 전자전 능력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고, 더 발전된 군사기술 이전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묵인하고 경제적 지원을 이어가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만 위기와 한반도 충돌 연계 가능성 제기
기고는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더욱 공격적인 핵 운용태세로 전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6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북한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러한 평가의 근거로 제시했다.
무력 충돌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북한이 도발 수위를 높여 한미의 군사적 대응을 유도하거나, 대만을 둘러싼 위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중국이 대만 관련 충돌에서 우위를 점할 경우 북한이 남한 공격에 나서면서 미군의 부담을 키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반대로 중국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 미국의 군사력을 분산하기 위해 북한에 제2전선을 열도록 압박할 가능성도 거론했다. 이는 실제 발생한 상황이 아니라, 대만과 한반도의 안보 위기가 맞물릴 경우를 가정한 분석이었다.
블루멘탈 연구원은 “김정은이 한국과 미국이 함께 대응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남한을 공격할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의 최근 조치들이 북한에 공동 대응 의지를 의심할 여지를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미 대북정책 비판… “공동 대응 의지 보여야”
미국 측 대응으로는 지난 3월 이란 전쟁 지원을 위해 한국에 배치된 패트리엇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구성 장비를 중동으로 보내기 시작했다는 보도를 거론했다. 지난 8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례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의 시작을 앞두고 훈련 규모를 줄였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북정책에도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지난해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과 북한으로 정보를 보내는 활동가들에 대한 단속, 북한 인권 관련 지원 축소 등을 거론했다. 북한의 핵무기·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동결을 조건으로 제재를 완화하자는 제안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기고는 이러한 조치에도 김 위원장이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적”으로 규정했다고 지적했다. 또 지난 9월 21일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폭발과 관련해 유엔군사령부가 정전협정 위반으로 판단하고 한국 국방부 장관이 북한을 비난했지만, 이 대통령은 “불행한 사고”라고 표현하며 긴장 완화 방안을 모색했다고 전했다.
블루멘탈 연구원은 이 같은 접근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내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희망하는 데 대해서도, 북한의 전략적 입지가 강화된 상황에서 정상회담이 김 위원장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도체 공장 타격 땐 전자제품·데이터센터까지 충격
한반도 무력 충돌의 경제적 파장은 AI 산업에만 머물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이 AI 가속기용 첨단 메모리뿐 아니라 현대 전자 시스템에 폭넓게 쓰이는 반도체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고는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 파괴되면 전자제품 제조업체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컴퓨터와 스마트폰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데이터센터 건설 역시 크게 둔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른 세계 경제의 손실은 충돌 첫해에만 4조 달러 이상으로,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3.5%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한국의 생산시설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세계 경제 전체의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블루멘탈 연구원은 “전략적·경제적 재앙을 피하려면 김정은의 공격성에 보상하는 대신 억제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 양국이 공동 방어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 북한의 오판 가능성을 낮춰야 한다는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