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릭 콜드웰의 기고글인 '우리가 질투하는 것은 잘못인데,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은 왜 잘못이 아닐까?'(Why is it wrong for us to be jealous, but not for God?)를 10월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릭 콜드웰은 기독교 변증 단체 ‘엠브레이스 더 트루스(Embrace the Truth)’의 연구원 겸 콘텐츠 책임자다. 팟캐스트 ‘올 라이즈 위드 압두 머리(All Rise with Abdu Murray)’를 진행하며 사상과 신앙의 역사, 신약성경 비평학, 제2성전기 유대교의 다양한 흐름, 고대 기독교에 관한 통찰과 해설을 제공한다. 또한 단체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질투는 연인이나 배우자에게서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 특성 가운데 하나다. 특히 상대를 의심하고 통제하려는 질투는 관계를 해친다. 그렇다면 성경이 ‘질투하는 분’으로 묘사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출 20:5).
성경은 하나님의 질투를 숨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신다. 그런데 인간의 시기와 질투를 경계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질투하신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인간에게는 금지하면서 자신에게는 허용하시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질투의 의미와 문맥을 살펴야 한다.
시기와 질투를 구별해야 한다
시기와 질투는 일상에서 비슷한 뜻으로 쓰이지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시기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탐내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이 가진 관계나 지위, 소유를 부러워하는 데서 나아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질투는 소중한 관계가 위협받을 때 느끼는 감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랑과 신실함을 약속한 배우자가 그 약속을 저버렸을 때 느끼는 아픔이 그 예다. 이러한 아픔 자체를 타인의 것을 탐내는 시기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감정이 상대를 소유물로 여기거나 통제하는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설명할 때 부부의 언약을 비유로 사용한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모습을 배우자의 불충실함에 빗대어 보여준다. 이때 하나님의 질투는 변덕스럽거나 불안정한 감정이 아니라, 언약 관계를 소중히 여기시는 사랑과 연결된다.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르는 일은 그 관계를 저버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이웃을 해치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질투는 이러한 파괴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태도이기도 하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한 보복과는 구별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문맥에서 읽는 하나님의 질투
출애굽기 20장 5~6절은 하나님의 질투를 심판과 은혜의 말씀 안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으시되, 자신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새로운 공동체로 살아가야 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취향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질서와 가치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에 관한 선택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벗어난 억압의 방식을 되풀이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있었다. 주변 민족의 우상숭배를 받아들여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참혹한 행위에 참여할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삶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맥에서 하나님의 질투를 단순히 사랑을 요구하는 위협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 초래할 파괴를 경고하고, 악을 심판하며, 백성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뜻을 함께 읽어야 한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한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어 하나님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말씀하신다(호 11:8). 또한 자신의 맹렬한 진노를 그대로 나타내지 않으시는 이유를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는 말씀으로 밝히신다(호 11:9).
이 말씀에는 심판의 엄중함과 함께 백성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는 긍휼이 드러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듭 경고하시며 돌아올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의 질투는 이러한 인내와 자비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질투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인간의 질투는 교만이나 불안, 소유욕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언약에 대한 신실함, 백성의 참된 유익을 향한 사랑에 뿌리를 둔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이 생명을 누리며 선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시며 거룩한 이름을 위해 질투하신다고도 말하지 않는가(사 48:11, 겔 39:25).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면, 왜 자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에스겔 36장 22~23절은 이 질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가운데서 더럽힌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행동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어 그 행동이 무엇인지 설명하신다. 흩어진 백성을 모으고 정결하게 하며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일이다. 이를 통해 여러 민족이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신다(겔 36:24~36).
에스겔 39장 25절에서도 거룩한 이름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등장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회복은 서로 분리된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과 자비를 드러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알고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회복은 연결돼 있다
성경은 이러한 회복을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도 연결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과, 여러 민족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게 되리라는 예언이 그 흐름을 보여준다(창 22:18, 사 19:21~25, 슥 8:20~23).
따라서 자신의 영광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사람들의 인정에 목마른 불안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이 참된 생명과 구원의 근원임을 열방에 알리려는 뜻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정으로 부족함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야 생명의 길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이며 그분과의 관계를 위해 지음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홀로 남겨지는 일이 두려우시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해치는 우상과 삶의 방식에 빠져드는 모습을 무관심하게 지켜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을 경쟁 상대로 여기며 무언가를 빼앗으려는 마음이 아니다. 사랑하는 백성을 지키고, 언약 관계를 회복하며, 파괴적인 길에서 돌아오게 하려는 거룩한 열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할 때 바라봐야 할 것은 인간의 소유욕을 확대해 놓은 모습이 아니라, 거룩함과 신실함으로 나타나는 그분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