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비가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로 다가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내면, 즉 자신의 “깊은 속”(잠 20:27)에서 일어나는 일에 호기심을 갖기를 바라신다. 의사이자 트라우마 전문가인 가보 마테는 이렇게 말한다. “트라우마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공감하는 증인이 부재한 상태에서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무언가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공감하는 증인이 되어 주기를, 당신 내면의 상처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당신과 다시 연결되기를,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당신을 돕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말 그대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존재가 되도록 당신을 창조하셨다. 성경은 연결에서 시작된다. 첫 두 장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와 함께 얼마나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친밀함을 누리셨는지를 어렴풋이 보여 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좋은 삶,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창조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마주치게 될 어떤 트라우마의 각인보다 깊은 하나님 형상의 각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다는 것(창 1:27)은 가치와 소속감과 목적이라는 무효화할 수 없는 유산을 중심에서부터 경험하는 것이다.
척 드그로트 - 내면을 돌보는 일
교회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차별과 거리감은 ‘미세차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세차별은 대개 다문화 감수성이 충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며,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편견과 차별을 가 리킨다. 뚜렷한 악의나 의도적 비하가 없더라도, 상대에게 소외감이나 위화감을 주고 정체성의 경계선을 의식하게 만 드는 언어적・비언어적 행위를 포함한다. 선한 의도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성찰 없는 선의는 오히려 무의식적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 미세차별은 쉽게 드러나지 않아 더욱 알아차리기 어렵고, 인식되지 않을수록 일상 속에 더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때때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주민 출신 목회자를 “목사님”으로 호명했다가, 순간 당황한 표정과 함께 “선교사님” 으로 급히 정정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단순한 호칭 실수가 아니다. 선교사든 목사든 어떤 호칭으로 불리든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장면에는 ‘인정’과 ‘불인정’이라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권주은 - 친절히 차별하는 교회
예수님은 침례 요한이 메시아이신지 묻는 질문에 치유와 복음 전파의 사역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보이신다. 요한을 크게 칭찬하시며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신다. 이어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을 책망하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약속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비난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신다. 또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며 선을 헹하는 것이 옳음을 가르치신다.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능을 사탄의 힘이라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신다.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요나의 표적 외에 보여줄 것이 없음을 말씀하신다.
이영훈 - NEW 한눈에 보는 신약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