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의 기고글인 ‘신학 지식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3 traits of someone who truly knows God — not just theology)를 8월 1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블라시오 작가는 문화 옹호자, 기독교 작가, 그리고 '문화를 분별하다'(Discerning Culture)의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인 마음(spiritual mindedness)’을 지닌다는 표현은 대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갈망하는 신자의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때로는 “세상일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만큼 하늘의 것에만 마음이 떠 있다”는 식의 우스갯소리로 희화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마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여러 특징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 가운데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주님의 용서를 ‘살아 있는 현실’로 누린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용서를 개인적으로 깊이 아는 데 있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참된 회개와 그로 인해 경험하는 은혜가 신자의 삶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기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한 여인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
그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으며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무거운 죄책감이 씻겨졌음을 실제로 경험한 데서 흘러나왔다. 주님의 용서를 하나의 교리로 아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삶을 뒤바꾼 현실로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은혜를 실제로 맛본 사람에게 주님의 용서는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능력이다.
용서의 경험은 또한 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배우게 한다. 필자는 최근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을 깊이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용서 그 자체, 곧 사랑을 선택하고 쓴 뿌리를 거부하기로 마음먹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보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훨씬 더 큰 유익을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사로잡힌 사람이 이해하는 영적인 마음의 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삶 속에서 실제 능력으로 역사할 때, 그것은 단순히 복음주의 신조나 교리적 문장을 암송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용서받은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법을 배운다.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건전한 신학’ 그 이상이다
복음주의 전통은 건전한 신학과 명확한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고, 정확한 신학과 탁월한 언변을 통해 교회의 사고를 형성해 온 이들을 높이 평가해 왔다. 이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은 단순히 ‘건전한 신학’에 동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참맛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라고 고백했다. 영적인 사람은 이 단맛을 알고, 그렇기에 더 간절히 갈망한다.
J. I. 패커(J. I. Packer)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서 올바른 신학 지식을 갖는 것과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했다. 만약 하나님을 아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개념적 정확성뿐이라면, 가장 뛰어난 성경학자와 신학자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머릿속에 올바른 신학 개념을 가득 채우고도 그 개념이 가리키는 실제를 마음으로 한 번도 깊이 맛보지 못할 수 있다. 반대로 성령으로 충만한 평범한 성경 독자가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지닌 사람보다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이신 분과 더 깊은 교제를 누릴 수도 있다.
이 차이는 에베소서 2장 8~9절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오직 은혜(Sola Gratia)’는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 교리다.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러나 이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그 은혜를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은 신조에 동의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이루었는지 알고 있으며, 지금도 그 은혜가 자신을 어떻게 붙들고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안다. 구원이 정말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앎이며, 관계이고, 실제적인 경험이다.
3. 영적인 마음은 은혜로운 영향력을 낳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영적인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세상에서 등을 돌린 채 홀로 신비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이 속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블루칼라 노동자일 수도 있고, 전문직 종사자나 운동선수, 학생, 교사, 혹은 응급구조 요원일 수도 있다. 직업과 환경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점점 더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가 실제 성품과 인간관계, 언어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현실이다. 신학자 데니스 응기엔(Dennis Ngien)은 『하나님의 가장 간절한 목적(God’s Most Earnest Purpose)』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실제로 관계 맺고 계심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말에서도 은혜가 드러난다. 필자는 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언어를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는다고 믿는다. 대화에서든 이메일에서든, 회의나 소셜미디어에서든 그들은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전한 권면을 삶으로 살아내려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
그렇다고 영적인 사람이 우유부단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성경적 확신을 소중히 여기며 필요한 순간에는 분명하게 말할 줄 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모욕하거나 짓밟지 않는다. 단호함과 은혜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옳다”라고 말해야 할 때는 옳다고 말하고,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는 분명히 아니라고 말한다(마 5:37). 그러나 그 말의 방식에서도 자신이 섬기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려고 한다.
신학을 넘어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사람
결국 영적인 마음은 자신의 신앙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아는 사람의 마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 목록에 동의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실제적이고 생생한 현실로 붙드는 일이다. 성령께서 성경의 말씀을 우리의 머리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까지 새기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분은 알고 사랑하며 신뢰하는 분이다. 그들은 용서를 교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은혜를 정의할 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은혜에 감격한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흘러나온 생명은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은 바울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신학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신학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