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칼 R. 트루먼 교수의 기고글인 ‘영국성공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What is the Church of England for?)를 7월 7일 (현지시각) 게재했다.
트루먼 교수는 그로브 시티 칼리지의 성서 및 종교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종교 및 공공 생활 분야의 윌리엄 E. 사이먼 펠로우로 재직한 바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는 당대의 자유주의 교회를 맹렬히 비판하며 그들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신랄한 한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다. "진노 없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 없는 인간들을 심판 없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다."
그가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암시했을 법한 사실은, 이러한 신학이 대개 유치하기 짝이 없는 형태의 예배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중문화의 취향을 짜깁기한 일종의 키치(kitsch, 조잡한 모방품)에 불과하며, 그걸 주도하는 자들에게 통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진보적인 교회는 늘 세상이 '엊그제' 멋지다고 여겼던 것들을 형편없이 흉내 내는 데 그친다.
6월 초 런던 거리를 걷다가, 필자는 영국 성공회(Anglican) 스타일의 이른바 '프라이드의 달(성소수자 인권의 달, Pride Month)'이 낳은 삼류 신학의 일류급 표본을 마주하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프라이드 행사는 예전만큼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트라팔가 광장의 캐나다 하우스 등에서 여전히 무지개 깃발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어떤 버전의 깃발을 걸어야 할지 다소 혼란이 있는 듯하며 트랜스젠더까지 포괄하는 디자인의 깃발은 예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마도 그 연합 전선이 너무 무리수를 둔 탓일 것이다. 1년 중 꼬박 한 달을 오직 자신들만을 축하하는 데 할애하고, 세계 곳곳의 번화가 상점부터 기업 본사, 정부 청사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상징을 도배해 놓는 집단이 스스로를 '소외된 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 매년 이토록 막강한 특권이나 문화적 권력을 만끽하는 집단은 세상에 없다. 게다가 지금의 프라이드는 대중의 정서보다 너무 멀리 앞서 나가버렸다.
필자를 빅토리아 시대의 꽉 막힌 반동주의자라고 불러도 좋다. 하지만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퀴어 '수인(furries, 털 달린 동물 캐릭터 분장을 하고 즐기는 이들)'의 등장이 늘어나는 것이 무지개 연합의 대중적 호소력을 넓혀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드가 여전히 압도적인 지배력을 과시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바로 영국 성공회 내의 진보적인 교구들이다.
해처즈(Hatchards) 서점에 들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필자는 어느 교회의 게시판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단순히 '프라이드의 달'을 지지하는 한 달짜리 예배 홍보가 아니라, 아예 1년 내내 이어지는 프라이드 행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3월에는 "차세대 퀴어 사제들"과의 Q&A(단돈 5파운드에 절찬 판매 중), 4월에는 퀴어 영화의 밤, 5월에는 성직자들을 위한 LGBT 질의응답 저녁 시간과 영화 '프라이드' 상영회, 6월에는 프라이드 예배, 7월에는 드래그(drag, 여장 남자) 공연과 또 다른 퀴어 예배, 8월에는 드래그 스포츠 데이, 9월에는 또 프라이드 예배, 10월에는 전환 치료 반대의 밤, 11월에는 두 번째 퀴어 영화의 밤이 예정되어 있었다. 압권은 12월이었다. 대중을 초청하여 진행되는 '퀴어 크리스마스 캐롤 예배'의 홍보 문구는 이러했다. "아름다운 성탄의 노래를 셰어(Cher), 아리아나 그란데, 데이비드 보위, 레이디 가가의 상징적인 퀴어 찬송(anthems)들과 뒤섞어 노래하며 참으로 잊지 못할 밤을 기념합시다."
이 교구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언약의 무지개를 납치하여, 1년 내내 인간의 성적 혼란에 갖다 붙이고 있었다.
이는 기독교가 초월적인 목적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이고도 비극적인 사례다. 진보 신학의 뼈아픈 아이러니 중 하나는, 그 지적인 주장이 아무리 세련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예배적(liturgical) 표현은 늘 유치함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시대에 말을 걸겠다며 당대의 취향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교회들은 대개 철저히 실패하고 만다는 점이다. 그들은 단지 주변 문화의 뻔한 레퍼토리를 민망하기 짝이 없는 종교적 관용구로 포장해 제공할 뿐이다. 심지어 대중에게 충격적으로 보이길 원하며 열광적으로 덤벼들지만, 정작 그 모습은 한물간 구닥다리에 불과하다. 런던의 진보적인 성공회 안에서 프라이드의 위상이 이토록 높아지고 있는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사회 전반에서 6월의 프라이드 장악력이 약화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벌어지고 있다.
나아가, 이 교회들은 예언자적 용기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지독한 '비겁함'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수한다고 주장하는 신앙의 진리보다, 성혁명이 낳은 유행하는 거짓말들을 긍정하는 편을 택한다. 기독교는 좌파든 우파든 지상 도성의 가치를 긍정하고, 그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거슬리고 충격적인 사건인 '하나님의 성육신'을 축하하는 자리에 매끄럽게 섞어 넣으려 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그 너머를, 위엣 것을,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다.
진보적인 교회들은 사람들을 진정한 인간성의 비전으로 되부르는 대신, 문화가 내놓은 기만적인 해답들을 서슴없이 제시한다. 이 시대의 문화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신흥 종교(성혁명 속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된 숭배)의 신화를 직시하는 일만 빼고는 뭣이든 다 할 기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이 시대의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다.
그 게시판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혹은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리처드 니버의 문장은 이제 이렇게 업데이트되어야 할 것 같다. "진노하든 말든 아무런 신(God)도 없이, 죄 없는 남자와 여자, 혹은 제3의 성을 가진 자들을, 십자가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는 사역을 통해, 아무런 심판도 없는 드래그(drag) 쇼로 인도했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정통 신앙을 향해 손짓이라도 하던 신앙의 언어적 관용구들마저 마침내 완전히 버려졌다. 겉보기엔 그 자리를 보위, 그란데, 셰어, 가가 같은 '신학적 거장'들이 대신 차지한 듯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지극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영국 성공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교구 예배력의 첫 번째 행사인 "차세대 퀴어 사제들"과의 Q&A 주제는 다름 아닌 "영국 성공회의 미래는 무엇인가?"였다. 필자가 (5파운드의 참가비는 면제받고) 그 질문에 직접 답을 주겠다. 만약 '프라이드의 해(Pride Year)'가 어떤 교구에서든 공식적인 예배의 현실로 버젓이 용인된다면, 그 교구는 더 이상 스스로를 교회라 불러서는 안 된다.
참으로 그 교구의 게시판을 읽는 동안 필자의 머릿속에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일갈이 떠올랐다. "당신들은 최근 그 어떤 선한 일을 하기에도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말하노니 떠나라, 이제 당신들과 끝을 내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