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케빈 브리긴스의 기고글인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보수적 흑인 기독교인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What white Evangelicals can learn from conservative black Christians)를 6월 3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케빈 브리긴스는 성경적일치센터의 상무이사로 섬기고 있으며, 앨라배마주 오번에 있는 그레이스 오번교회에서 평신도 장로로도 섬기고 있다. 은퇴한 군 정보 전문가인 그는 22년간 군 복무를 마쳤으며, 중동학 학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종, 문화, 교회 안의 일치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라보도록 돕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그들의 이름을 부르라!"
트레이본 마틴. 마이크 브라운. 브리오나 테일러. 조지 플로이드 등 수년 동안, 보수적인 흑인 기독교인들은 인종적 정체성과 집단적 결속을 최우선으로 삼으라는 거센 압박 속에서 신앙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필자 역시 구호들을 따라 외치고, 해시태그를 공유하며, 특정 사회 운동에 공개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기대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너희 동족(your people)과 연대하라"는 것이었다.
백인 성도가 다수인 남침례교회에서 흑인 평신도 목회자로 사역하면서, 필자는 특정 내러티브에 순응하라는 엄청난 사회적 압박을 경험했다. 그 내러티브는 흑인 미국인들이 구조적으로 억압받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그들의 존재에 적대적인 국가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류 언론 매체,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 유명 인사, 활동가들은 매일같이 이런 주장을 쏟아냈다. 무장하지 않은 흑인 남성들이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는 영상들이 뉴스 사이클과 소셜 미디어 피드를 장악했다. 그 감정적 파급력은 무척이나 강력했고, 많은 사람이 거기에 동요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어쩌면 필자 역시 그 내러티브를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도리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필자의 귓가에 맴돌던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삶과 정체성,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단단한 토대였던 성경적 세계관과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국 남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자랐다. 신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며 평생을 교회에서 보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필자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의 근간이 된 성경적 원리들을 심어주셨다. 그분들은 용서와 개인의 책임, 그리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셨다.
이러한 가르침은 실제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단지 피부색이라는 렌즈를 통해 판단받거나, 고정관념에 갇히거나, 규정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유한 개인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나의 백인 형제자매들을 일차적으로 '인종'이라는 렌즈로 재단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죄나, 그들이 참여한 적도 없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그들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필자의 가장 우선되는 정체성이 민족이나 피부색에 있지 않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지난 수년간, 필자는 이러한 확신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M)'와 같은 운동들이 조장하는 피해자 내러티브를 단호히 거부했던 많은 보수적 흑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공통된 맥락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인종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며 역사적 불의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인종'을 우리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심축으로 삼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기독교가 신자들을 인종적 연대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부르심으로 초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직면한 새로운 유혹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몇 년 동안, 필자는 일부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과거 우리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유혹에 직면하는 것을 목격해 왔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기관들이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이니셔티브와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 정치를 수용했다. 이 시기 동안 백인들, 특히 이성애자 백인 기독교인 남성들은 종종 억압자이거나 불의한 시스템의 수혜자로 묘사되었다.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 『어떻게 반인종주의자가 될 것인가(How to Be an Antiracist)』, 『1619 프로젝트(The 1619 Project)』 같은 베스트셀러들은 종종 미국 역사와 현대 사회를 인종적 권력 역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재단했다. 널리 알려진 한 사례로, 코카콜라와 관련된 다양성 교육에 참여한 직원들은 "덜 백인스럽게 행동하라(be less white)"는 황당한 권고를 받기도 했다.
예상대로 많은 백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메시지에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 때문에 직장 내 차별, 사회적 적대감, 또는 문화적 소외를 경험했다. 또 어떤 이들은 단지 피부색이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문제에 대해 도매금으로 비난받는 것에 지쳐버렸다.
이와 동시에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흑인 가해자와 백인 피해자가 연루된 사건들을 점점 더 기형적으로 확산시켰다. 카멜로 앤서니(Karmelo Anthony)와 오스틴 멧캐프(Austin Metcalf)가 얽힌 치명적인 충돌 사건 같은 경우들이 온라인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특정 인종적 내러티브에 들어맞는 다른 폭력 범죄들 역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유포되었다.
그 결과, 일부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수년 전 보수적인 흑인 기독교인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든 사건을 '인종'의 렌즈로 해석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개인이 아니라, 특정 인종 집단의 일원으로 우선시하라는 부추김을 받았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서 목격했던 부족주의(tribalism)에 대한 반작용으로, 스스로 피해의식을 채택하고 또 다른 형태의 '인종적 부족주의'를 수용하려는 유혹에 빠졌다.
성경적 기독교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보수적인 흑인 기독교인들로부터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한 형태의 인종적 부족주의를 이기는 해답은 반대편의 인종적 부족주의로 맞서는 것이 아니다. 해답은 오직 성경적 기독교뿐이다.
BLM 시대의 압박에 저항했던 보수적 흑인 기독교인들은 결코 역사에 눈이 멀거나 불의에 무관심해서 저항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의 세계관이 철저히 성경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종이 인간 다양성의 실제적인 한 측면이긴 하지만, 결코 우리 정체성의 기초가 될 수는 없음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신약성경은 신자들의 가장 깊은 충성이 인종, 민족, 국적, 혹은 정치적 성향을 향한 것이 아님을 거듭 상기시킨다.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충성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사도 바울 역시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이 구절들이 민족적 차이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차이점들을 올바른 맥락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정체성은 세상의 그 어떤 범주보다 위대하다.
피부색을 넘어선 진짜 '우리의 동족'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유혹은 역사 내내 끊임없이 존재해왔던 유혹과 동일하다. 세상은 부족, 계급, 민족, 정치, 또는 국적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서로 경쟁하는 집단으로 분열시키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집단 편에 굳게 서서 그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의무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복음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전을 제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족'은 피부색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진짜 동족은 하나님의 권속(household of God)에 속한 사람들이다. 교회는 모든 부족과 방언과 민족에서 나아온 신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다. 우리는 '혈통의 공유'가 아닌 '구원자의 공유'를 통해 하나로 연합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인종적 정체성을 기독교적 정체성 위에 올려놓으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그 압박이 정치적 좌파에서 오든 우파에서 오든, 우리의 대답은 동일해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명확히 밝힌 바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이 혼란스러운 문화적 시대 속에서 신실함을 잃지 않으려면, 우리가 누구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흑인 기독교인, 백인 기독교인, 히스패닉 기독교인, 혹은 아시아계 기독교인이 먼저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의 정체성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