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모든 순간은 결국 지나간다. 기쁨도 슬픔도 예외는 없다. 그것들은 모래알처럼 쥐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결국 다 강물처럼 흘러가 버린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이 순간을 주님께 감사와 겸손으로 살아내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그분을 사랑하는 자라고 선언하셨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사랑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순종으로 증명된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은 언제나 육신의 희생과 마음의 피 흘림을 요구한다. 그게 쉬운 일 같으면 왜 주님께서 좁은 길은 찾는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구속의 속옷을 입은 이후에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서 스스로 씻고 성결의 삶으로 세마포를 입어야만 한다. 또한 반드시 그 위에 나를 향한 사랑으로 단장하는 예복을 갖춰 입은 자가 되어야 한다.
제시카 윤 - 레바논의 시내
결과적으로 비록 우리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는 전제를 수용한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메시지가 종종 황홀경에 빠진 점술가의 점괘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설령 우리가 예언자들의 역할에서 전망가의 모습을 더 많이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예언자들을 통찰력 있는 문화 비평가로 격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미래에 대한 무작위적이고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며, 그것들은 언약,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정황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존 H. 월튼 - 예언서의 잃어버린 세계
“혹 크레올 성경책 있으면 좀 주시겠어요?”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 나라 종족 공용어가 ‘크레올’인데, 그 종족어 성경책을 다른 나라에서 온 동양인에게 요구한다는 것이 너무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경찰의 요구치고는 너무나 황당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우리 여행 가방 속에 든 크레올 성경책 한 권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감비아에서 떠나오기 전, 혼자서 열심히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그때 선반 위에 있던 웬 까만 책자 하나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던진 것처럼 내 옆으로 뚝 떨어졌다. 그래서 뭔가 하고 보니 검정 표지에 ‘노부 떼스따멘뚜’라는 금박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스페인어와 유사한 점이 있어 나는 그것이 신약 성경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마 그것은 감비아에 있는 기니비사우 사람들을 위해 전도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닥에 떨어진 이해도 못할 그 성경책을 무심코 여행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렇게 가져온 성경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이런 외진 곳에서 맞닥트리게 될 줄이야!
이인응 - 두제의 크레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