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신학회(회장 최태영)가 최근 서울 광성교회에서 제12회 연구위원회 연구모임을 개최하고 성서신학과 현대 사회윤리를 아우르는 연구 발표를 진행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최용희 박사(광주서림교회 담임)가 ‘금지가 낳은 욕망: 로마서 7장의 율법과 은혜에 대한 라깡적 성찰’을, 김 석 박사(장신대)가 ‘AI와 디지털 다주의 시대의 생명정치신학’을 각각 발표하며 신학적 논의를 이어갔다.
◆ 로마서 7장 해석의 간극, 라깡의 ‘외밀성’으로 접근
최용희 박사는 발표를 통해 로마서 7장 해석사에 존재해 온 두 개의 주요 해석 전통 사이의 간극을 조명했다.
그는 “케제만(Ernst Käsemann)과 마틴(J. L. Martyn)으로 대표되는 묵시적 바울 해석이 죄를 아담 이후 우주를 지배하는 인격화된 권세로 이해한다”며 “이 관점에서 로마서 7장에 등장하는 ‘나’는 우주적 세력의 지배 아래 놓인 존재이며, 죄는 외부에서 인간을 장악하는 권세로 이해된다”고 했다.
이어 “반면 루터(Martin Luther)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로 이어지는 내성적 해석 전통은 로마서 7장을 인간 내면의 갈등과 분열에 대한 고백으로 읽어왔다”고 했다.
최 박사는 “이 두 해석 전통이 각각의 강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약점을 충분히 보완하지 못한 채 병렬적으로 공존해 왔다”며 “묵시적 해석은 죄의 우주적 차원을 강조하지만 그 권세가 개별 주체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고, 내성적 해석은 인간 내면의 갈등을 정교하게 분석하지만 죄의 우주적·초개인적 차원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논의를 언급하며 “로마서 7장을 서구적 내성의 틀로만 읽는 것은 바울의 본래 맥락을 왜곡할 위험이 있지만, 동시에 죄의 내면적 작동을 외면할 경우 로마서 7장 15절부터 20절까지 나타나는 강렬한 내적 고백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최 박사는 자크 라깡(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에서 발전된 ‘외밀성’ 개념을 해석 도구로 제시했다.
그는 “외밀성이 가장 낯선 외부의 것이 가장 친밀한 내면의 것으로 구성되는 역설적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이라며 “바울이 로마서 7장 17절에서 말한 ‘내 속에 거하는 죄’가 바로 이러한 외밀성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했다.
최 박사는 “기존의 프로이트와 융 심리학에 기반한 독해가 죄의 외부적·우주적 차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묵시적 해석과 내성적 해석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지 못했다”며 “라깡의 외밀성 개념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해석적 틀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최 박사는 로마서 7장 17절부터 23절에 나타난 ‘내 속에 거하는 죄’에서 외밀성의 핵심 구조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반면 24절과 25절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단절은 외밀성 분석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은혜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은혜를 외밀적 구조 안에서의 내재적 재배치나 변화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침입으로 규정했다”며 “라깡의 ‘생톰(sinthome)’이나 지젝의 ‘환상 가로지르기’와 같은 내재적 해결 방식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개입이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한다”고 했다.
최 박사는 연구의 핵심을 “외밀성은 ‘적응하려는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구조적으로 해명한다”는 명제로 정리했다. 그는 “인간의 곤경이 외밀적 교착 상태인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으며,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적응적 개입이 우연한 은총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필연적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자신의 선행 연구가 코헛의 자기심리학과 위니캇의 대상관계 이론을 통해 ‘적응하려는 하나님’의 적응 방식을 설명했다면, 이번 연구는 라깡의 외밀성 개념을 통해 그 적응이 왜 필연적인지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이번 연구가 하나의 완결된 결론이 아니라 새로운 논의를 향해 열려 있는 연구”라고 전했다.
◆ AI 시대와 디지털 다윈주의 속 생명정치신학의 과제
이어 발표에 나선 김 석 박사는 AI와 디지털 다주의 시대를 맞아 기독교 시민윤리가 어떠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김 박사는 최근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100년 이상의 역사적 데이터와 100개 이상의 메가트렌드를 분석해 제시한 ‘2050년 세계 4대 시나리오’를 언급하며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기후 협력이라는 긍정적 전망 이면에 디지털 다윈주의라는 심각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디지털 다윈주의가 기술 기업의 급속한 성장과 탈규제, 그리고 심화되는 불평등을 특징으로 하는 체제”라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객체화되고 수치화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고 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김 박사는 프랑스 철학자 미셀 앙리(Michel Henry)의 ‘자기 촉발’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흐르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자각하는 것이 단순한 심리적 위안을 넘어 존재론적 혁명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러한 자각은 외부 권력이 부여한 데이터 프로필이나 시장 가치에 기반한 정체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부여한 생명의 고유성과 존엄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사랑과 고뇌, 기도, 그리고 살아 있음 자체에 대한 감각과 같이 시장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생명 활동이 거대한 데이터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존재론적 저항이 될 수 있다”며 “이러한 자각을 통해 인간은 알고리즘의 예측과 분류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영적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영적 주체성이 외부의 평가나 보상에 의존하지 않고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근거해 기술 중심 사회의 비인간적 질서에 저항하는 힘을 제공한다”고 했다.
◆ 기독교 시민윤리와 생명 공동체의 형성 강조
김 박사는 “자기 촉발을 통해 회복된 영적 주체성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고통받는 타자를 향해 확장된다”며 “자신의 생명이 지닌 절대적 가치를 인식한 사람은 알고리즘과 데이터 시스템에 의해 ‘무가치한 존재’로 규정된 타자의 생명 속에서도 동일한 존엄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공감이 단순한 연민을 넘어 기술 권력이 만들어낸 위계 구조를 해체하는 생명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진다”며 “회복된 주체들은 기술적 소외의 현장에서 타자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며 효율성과 경쟁이 아닌 서로의 생명을 함께 누리는 관계망을 구축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실천은 디지털 다윈주의가 강요하는 경쟁 논리를 넘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성육신적 연대의 모습”이라며 “나아가 기독교 시민윤리는 파편화된 디지털 사회를 생명의 유기적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어떠한 생명도 시스템의 논리에 의해 버려지지 않는 생명 공생을 지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기독교 시민윤리가 이론적 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그 첫 번째 실천 모델로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의 윤리’에 기반한 무조건적 환대를 제시했다.
그는 “알고리즘 통치성이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고 등급화하는 시대에 시스템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로 등장한다”며 “이러한 타자의 얼굴은 배제하지 말라는 요청이자 윤리적 명령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디지털 장벽 뒤로 밀려난 이들을 공동체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환대의 실천은 기술 권력의 도구적 논리에 맞서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이 된다”며 “이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한책임을 수용함으로써 디지털 배제 구조를 해체하는 윤리적 전환”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두 번째 실천 모델로 ‘시민적 파레시아(Parrhesia)’를 제안했다. 그는 “파레시아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공적 공간에서 윤리적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고 정의했다.
이어 “인간을 생산성과 데이터 효용성으로만 평가하는 기술 권력의 허구를 드러내고, 시스템이 가치 없다고 판단한 생명의 존엄을 신앙적·시민적 언어로 증언하는 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성육신적 파레시아”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환대와 파레시아의 실천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효율성과 속도를 숭배하는 디지털 문화에 맞서는 ‘기독교 시민윤리의 대항-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끝으로 그는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활동들이 디지털 다윈주의의 적자생존 논리에 반하는 ‘의도적 비효율성’을 지향해야 한다”며 “알고리즘이 가치 없다고 판단한 이웃의 삶을 돌보고, 데이터 격차로 소외된 사람들의 생명을 보살피며,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돌봄의 실천이야말로 타자의 환대 요구에 응답하는 기독교적 몸의 윤리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라고 전했다.
한편, 이날 연구모임은 발제와 토론에 이어 광고, 친교 및 임원회 순서로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