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2일 뉴욕타임스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 어떤 소유도 예상되지 않는다. 철저한 일본 경찰의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전혀 모른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 등 서구의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제의 한국 병합 사실을 쏟아내고 있었다. 1910년 8월 18일 자 뉴욕타임스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본의 한국 병합이 곧 실천된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독립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맺은 조약(을사늑약)으로 실질적으로 종식되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어서 8월 20일, 25일에 한국의 모든 지역은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감시하에 있으며 수많은 일본 군정이 한국 해안을 순찰하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여러 정황들을 볼 때에 병합은 임박했다고 했다.
그리고 8월 22일 자에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에 사라진다’라는 제목으로, 일주일 내에 은둔의 왕국 대한제국은 역사적 용어가 되고 1,208만 인구는 일본에 더해지며 잉글랜드만 한 크기의 영토는 일본 제국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후 8월 23일 자에 ‘한국은 이제 일본이다’, 8월 25일 자에 ‘일본이 곧 한국의 병합을 공포할 것이다’ 등 연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전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8월 25일 자에 ‘일본의 한국 병합이 언제든 실현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으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먼저 대영제국은 영일동맹에 따라서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 정치, 군사, 경제적 이익을 갖는 것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더 타임스의 관심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한 것뿐이었다. 8월 27일 자 더 타임스의 ‘편집자에게’ 코너에 ‘일본은 상업 및 산업에서 모든 나라에 동등한 기회 원칙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흥복전에서는 한·일 합병 처리를 위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남산 기슭 조선 통감 관저에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에서 남산 쪽 서울소방방재센터 방향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서울유스호스텔(옛 안기부 건물 본관) 진입로가 나온다. 일제의 조선통감부가 있던 자리이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제3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서 일·한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1주일 후인 8월 29일에 이것을 공표했다. 을사늑약의 현장인(1905년) 서울 정동 덕수궁 중명전이 사적(제124호)으로 지정되고 국치 100년을 맞는 2010년 8월 29일 일반에게 공개되었지만, 정작 병합 늑약의 현장인 이곳은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지가 없다.
강제병합 후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가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에게 보고한 ‘한국병합시말’에 따르면 데라우치는 8월 18일 이완용에게 두 나라를 합쳐서 하나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이완용은 한국 국민의 감정을 고려해서 국호는 한국으로 존속시키고 황제의 칭호는 왕으로 하며 황제는 이왕 전하로 칭한다는 것을 본국으로부터 통보받았다며 일본 정부가 이렇게 정한 이상 한국은 조약 체결에 착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후 22일까지 대한제국의 고관들이 통감 관저로 드나들었고 한·일 병합 조약은 일제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을 처리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는 8월 22일 창덕궁 흥복전에서 열렸다. 오후 1시 일제와 사전 조율을 마친 총리대신 이완용과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 이병무, 황실 대표 이희,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입전했다.
오후 2시 순종 황제는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과 함께 흥복전에 들어왔다. 이 자리에서 순종은 데라우치의 각본대로 이완용을 전권대신에 임명했다. 창덕궁 흥복전은 궁궐 문 4개를 지나야 나타나는 구중궁궐 속에 있다. <계속>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