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하나님이 오늘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을 주신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If God offered you these 2 choices today, which would you pick?) 6월 1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 하나님이 당신 앞에 나타나 두 가지 선택지를 주신다고 상상해 보라.
첫 번째 선택지에서는 당신이 짊어진 모든 무거운 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잃어버린 모든 것이 회복되고, 모든 실망이 환희로 바뀌며, 모든 상처가 깨끗이 낫는다. 당신의 삶은 한때 간절히 바랐던 바로 그 완벽한 모습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선택지에서는 당신을 괴롭히는 상황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을 놀랍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빚어주실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정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 중 상당수는 이 선택 앞에서 깊이 갈등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준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도대체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 걸까?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빚어질 것인가'에 집중하고 계신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께서 이 짐을 치워 주시고, 상처를 치유하시며,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기도를 들어 주시거나, 막힌 문을 열어 주시고, 예전의 평온했던 삶으로 되돌려 주시기를 원한다. 물론 이런 것들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성경도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간구하라고 거듭 권면한다(빌 4:6-7; 히 4:16; 시 55:22; 벧전 5:7). 그러나 우리가 종종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만 몰두해 있는 동안, 하나님은 대개 훨씬 더 위대한 일, 즉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 진리에 대해 가장 명확한 선언 중 하나를 제시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확신에 차서 말한 직후, 그는 그 궁극적인 '선(good)'이 무엇인지 바로 설명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로마서 8:29).
이 말씀이 '하지 않는' 이야기에 주목해 보라. 본문은 하나님의 가장 큰 목적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의 주된 목표가 번영, 성공, 영향력, 건강, 혹은 이 땅에서의 행복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내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 당연히 '고난'까지도 포함하여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분의 더 거대한 작업의 일환으로 사용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구성하는 가장 위대한 자질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시기에는 좀처럼 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내는 기다림 속에서 배워진다. 끈기는 고난을 통해 단련된다. 겸손은 실망과 좌절을 겪으며 자라난다. 긍휼한 마음은 슬픔을 통과할 때 깊어진다. 믿음은 시험을 받을 때 성숙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깨달을 때 비로소 꽃을 피운다.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가장 감탄하며 우러러보는 미덕의 상당수는, 바로 고난이 배양해 낸 자질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귀한 종들의 삶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목격한다.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유아기 때 의료 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평생 앞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깊은 고난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성도들에게 힘을 주는 수많은 찬송가를 지은 위대한 여성을 빚어내셨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나 "하나님께 영광(To God Be the Glory)"을 부르지만, 정작 이 찬양을 쓴 사람이 평생 단 한 번도 떠오르는 태양이나 웅장한 산맥, 혹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잘 떠올리지 못한다.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는 17세 때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가 전신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간증과 저서, 사역은 전 세계 셀 수 없이 많은 성도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그녀는 고난이 어떻게 자신을 그리스도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었는지, 고난이 아니었다면 결코 배우지 못했을 진리들을 어떻게 깨우쳐 주었는지 자주 고백하곤 한다.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 믿음의 선배들 중 누구도 세상 사람들이 이상적이라고 여길 만한 '현실의 회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빚어져 진정으로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 그 자체가 선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질병은 좋은 것이 아니다. 상실도 좋은 것이 아니다. 시력을 잃는 것이나 마비되는 것, 죽음 역시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타락한 세상의 파편들이며,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무나도 경이로운 주권을 가지신 분이기에, 그 고통스럽고 부서지고 비극적인 것들마저도 가져다가 우리의 마음을 조각하고 믿음을 깊게 하며 우리를 예수님과 더 닮은 모습으로 만드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7)라고 기록했다.
금은 불로 연단되고, 믿음은 시련으로 단련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때로는 뼈를 깎는 듯한 극한의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 아래에서 빚어진 결과물은 언제나 눈부시게 존귀하다.
일시적인 고통이 빚어내는 영원한 보물
그런데 여기에는 훨씬 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변화'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의 상황은 일시적이다. 당신이 사는 집도, 당신이 가진 직위도, 당신이 모은 재산도 모두 잠시뿐이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신마저도 일시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빚어지고 있는가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언젠가 이 땅의 모든 직함은 내려놓게 될 것이다. 모든 권력은 사라질 것이며, 모든 업적은 빛바래고, 세상의 모든 명예는 잊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종들 안에 빚어내신 '겸손'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번민하는 성도들 안에서 그분이 강하게 하신 '믿음'은 그 믿음을 낳게 한 고통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성도가 통과하는 불같은 시련 속에서 그분이 배양하신 '거룩함'은, 끝없는 낮만 존재하는 저 천국에서 영혼의 영원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그분이 자녀들 안에서 길러내신 '끈기'는 그것을 필요로 했던 환난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이 칠흑같이 어둡고 섭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구주를 신뢰하는 이들 안에서 그분이 깊게 하신 '사랑'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거룩한 노래로 울려 퍼질 것이다.
이것들은 일시적인 성취가 아니다. 영원한 보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단순히 불편함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것보다,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내는 데 더 깊은 관심을 두시는지를 명확히 설명해 준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제 상황을 바꿔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 순간,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바꾸고 있단다."
결국에는, 이것이 훨씬 더 위대한 기적임이 증명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경이로운 고백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7).
바울은 그저 환난 '다음에' 영광이 찾아온다고 말하지 않았다. 환난이 영광을 '만들어 내고 있다(이루게 한다)'고 선언했다.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찻잔
오래전, 작자 미상의 '찻잔 이야기(The Teacup Story)'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필자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삶의 고난을 바라보는 필자의 시각을 깊이 바꿔놓았다.
어느 여인이 선반 위에 놓인 아름다운 찻잔을 보았다. 그녀는 찻잔의 우아한 윤곽과 매끄러운 마감, 사랑스러운 문양에 감탄했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리자, 찻잔이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 나도 그저 형태도 없고 평범하며 보잘것없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던 때가 있었지. 그러다 주인이 나를 집어 들고는 주무르고, 두드리고, 빚기 시작했어. 나는 '멈춰요! 너무 아파요!'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그저 '아직 아니란다(Not yet)'라고만 대답할 뿐이었어.
그러고는 나를 물레 위에 올려놓고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계속 돌렸어. '제발 멈춰주세요! 너무 어지럽고 지쳤어요!' 내가 울부짖었지만, 그는 또다시 '아직 아니란다'라고 말했어.
그 후 주인은 나를 뜨거운 가마 속에 집어넣었단다. 그 열기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지. 나는 여기서 타서 없어질 거라고 확신했어. '주인님, 도대체 왜 제게 이러시는 거예요?' 부르짖었지만, 불길 너머로 '아직 아니란다'라는 그의 음성만 들려올 뿐이었어.
마침내 그가 나를 꺼내어 한쪽에 내려놓았어. 드디어 고통이 끝났구나 싶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내 몸에 색칠을 하기 시작하는 거야. 물감 냄새는 지독했고 붓질은 너무나 낯설었어. 도무지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직 아니란다'라고 말했어.
이윽고 두 번째 가마에 들어갈 차례가 되었지. 처음보다 훨씬 더 뜨거웠어. 이번에야말로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했단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주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
마침내 그가 나를 가마에서 꺼내 거울 앞에 세워주었지. 나는 내 눈에 비친 모습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단다. 나는 더 이상 거칠고 투박한 진흙 덩어리가 아니었어. 주인의 목적에 맞게 예비된, 아름답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던 거야.
그제야 주인이 말했어. '내가 너를 짓누를 때 너는 이해하지 못했지. 내가 너를 빙글빙글 돌릴 때도 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널 불 속에 넣었을 때 너는 내가 널 파괴한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었단다.'"
물론 이 작은 이야기는 성경 말씀이 아니다. 하지만 성경적 진리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우리가 받는 압박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불같은 시련도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우리를 빚어가는 그 과정은 결단코 잔인한 것이 아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비록 우리가 지금 당장은 그 완성품을 보지 못할지라도, 당신께서 지금 무엇을 만들고 계신지 정확히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만들어 내시는 것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이 세상을 넘어선 저 너머에까지 이르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이 삶은 그저 역경을 '버텨내는' 과정이 아니다. 이 삶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바로 그 사람으로 '빚어지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 아니다. 그것은 천국에 합당한 자로 빚어지는 준비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