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11–12절에서 바울은 할례의 의미를 다시 정리한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무할례시에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할례는 그 이후에 주어진 표였다. 다시 말해 할례는 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확증하는 인침이었다.
바울은 “인친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은 소유와 확정을 의미한다. 어떤 것에 인을 친다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분명히 표시하는 행위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인 또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인침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확정하는 은혜의 표다.
그러므로 할례 자체가 아브라함을 의롭게 만든 것이 아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이미 믿음으로 받은 의를 눈에 보이게 확인하는 표였다. 오늘날 세례도 마찬가지다. 세례는 구원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은혜를 더욱 분명하게 붙드는 표다. 의식은 은혜를 가리키는 표지가 될 때 귀하지만, 은혜를 대신하려 할 때 신앙은 변질된다.
신앙의 위기는 언제나 은혜를 인간의 의식과 공로로 바꾸어 놓을 때 찾아온다. 십자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잊어버린 채, 형식과 절차만을 구원의 조건처럼 붙든다면 복음은 흐려진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의 길이 처음부터 오직 은혜와 믿음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원은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부르셨을 때, 삭개오는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마음으로 수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죄의 권세 아래 자유를 빼앗긴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셨다. 마치 죄수의 옷을 벗기고 새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정죄의 자리에서 자유의 자리로 옮기셨다. 이제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 이름을 잃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녀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 은혜가 아브라함에게만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고, 또한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할례자의 조상도 되었다. 중요한 것은 외적 표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은혜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들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은혜를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은혜의 표지를 은혜 자체로 착각하고 있는가. 예배와 세례와 교회의 모든 의식은 소중하지만,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나의 의식, 나의 행위,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치셨고,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 놀라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