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끊지 못하는 것이 하나쯤 있다. 누군가는 커피, 누군가는 담배, 누군가는 스마트폰이다. 내게 그것은 단연 김치다. 돌아보면 내 일생은 김치와의 동행이었다. 아니, 동행을 넘어 중독에 가까웠다.
어릴 적 기억 속 겨울은 늘 김장으로 시작됐다. 외갓집 텃밭에서 리어카로 실어 온 배추와 무가 마당 한가득 쌓이면, 커다란 드럼통에 소금물을 풀어 절여놓았다. 다음 날이면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요즘 말로 하면 ‘김장 페스티벌’이었다. 품앗이로 집집마다 돌아가며 김치를 담갔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늘 같았다. 갓 버무린 김치 한 포기를 찢어 삶은 돼지고기에 얹어 한입 크게 베어 무는 순간. 그 맛은 아직도 혀끝에 살아 있다. 김장날은 온 동네 잔칫날이었다. 지나가던 누구라도 들어와 흰쌀밥에 김치, 수육 한 점 얻어먹고 웃으며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던 때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도시락 반찬의 절반은 김치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 도시락 뚜껑을 열어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치, 김치, 또 김치. 그런데 이상했다.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치 하나면 밥 한 공기가 모자랐다.
군대에서는 김치의 진짜 힘을 배웠다. 최전방 GP에서 처음 본 군대식 김장은 충격이었다. 배추와 무를 대충 씻어 소금물 드럼통에 넣었다가, 고춧가루 양념통에 잠깐 담갔다 빼면 끝. 그렇게 만든 김치를 땅에 묻은 김장독에 저장했다.
눈이 한번 오면 1미터씩 쌓이는 비무장지대. 보급이 끊기면 하루 세끼 김치만 먹었다. 대충 담근 그 김치가 얼마나 짜고 시었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그런데 그 혹독한 겨울을 버티게 한 것도 결국 김치였다.
신혼 시절 아내가 담가준 겉절이도 잊지 못한다. 도시락을 싸가면 동료들이 늘 먼저 젓가락을 뻗었다. “자네 부인 손맛 좋네.” 칭찬 한마디에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내 도시락 반찬 중 제일 먼저 바닥난 것도 늘 김치였다.
목회하던 시절, 장기 금식기도를 마치고 보호식을 시작할 때 성도 한 분이 배추 물김치를 담아왔다. 금식 끝에 입안에 퍼지던 그 시원함. 톡톡 터지는 국물 맛 속에는 김치보다 더 깊은 정성이 담겨 있었다. 몸은 맛을 기억하고, 영혼은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온 나라가 붉게 물들었다. 거리마다 “대~한민국!”이 울려 퍼졌고, 교회 본당까지 응원장이 되었다. 어떻게 우리가 4강까지 갔을까. 그때 누군가는 말했다. “김치의 힘이다.”
과학적 근거는 몰라도 정서적 근거는 충분했다. 붉은 악마의 붉은 티셔츠, 붉은 고추가 듬뿍 들어간 김치,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선수들의 심장. 그 조합이면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해 여름,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금도 나는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다. 배추김치, 깍두기, 열무김치, 파김치, 갓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오이소박이, 묵은지까지 다 좋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일하다 라면과 컵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반찬은 묵은 신김치 하나. 그런데 그걸로 충분했다.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또 열무김치가 당겼다.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나니 속이 편안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겠다. 나는 김치 중독자다.
다시 월드컵 시즌이다. 우리 선수들이 지구 반대편 멕시코 고지대로 날아갔다. 첫 경기부터 극적인 역전승으로 징크스를 깼다. 내일은 두 번째 경기다.
승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김치를 먹고 자란 사람들의 끈기와 독함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는 것.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손맛이고, 배고픈 시대를 버틴 생존의 맛이며, 함께 나누던 공동체의 기억이다.
어쩌면 오늘의 대한민국도 그 김치 한 포기에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번에도 믿어본다. 김치의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