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리라”(마 20:8-16)
우리나라는 경제적·문화적으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도와 사회 신뢰는 여전히 낮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향해 가장 크게 제기하는 불만 가운데 하나는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에 불을 지른 것이 최근 삼성전자, 하이닉스의 성과급이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어떤 부서는 수억 원의 성과급을 받고, 어떤 부서는 아주 적은 보상을 받으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갈등이 커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 공정한가?”를 다시 묻게 된다.
삼성전자의 성과급 지급은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은 누구의 것인가?” “주주들의 동의 없이 거액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적법성 문제도 제기한다. 우리 상법상 회사의 이익은 원칙적으로 회사의 재산이며, 궁극적으로는 위험을 부담하며 투자한 주주들의 권리이다. 따라서 이익배당은 원칙적으로 주주총회의 승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물론 성과급은 일반적으로 근로의 대가인 임금 또는 보수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과 내부 규정에 따라 지급된다면 별도의 주주총회 결의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경영진이 회사의 장기적 이익과 주주 가치를 훼손하면서 까지 과도한 성과급을 지급한다면, 충실의무 위반이나 배임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다.
법적 정의(正義)의 오래된 원칙 가운데 하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공정은 무조건 똑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경우에는 차별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에는 그 차이를 고려하는 것이다. 같은 노동에는 같은 보상이 필요하지만, 책임과 기여가 다르면 보상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한 회사에서 일하는데 성과급이 수십 배, 심지어는 백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면 과연 우리 사회가 수긍할 수 있는 정당한 차이일까 ? 더욱이 그것이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행동이나 파업을 배경으로 얻어진 결과라면, 우리는 더욱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법적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처음 읽을 때 매우 불공정하게 보인다 (마 20:1-16). 포도원 주인은 새벽부터 사람들을 불러 일하게 하고, 또 제3시, 제6시, 제9시, 심지어 제11시에도 품꾼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품삯을 계산할 때 마지막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새벽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다. 당연히 먼저 온 품꾼들은 불평한다. 시간으로 보면 열 배 가까이 더 일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과 기여도가 다른데 같은 보수를 지급했으니, 세상의 정의 기준으로 보면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인은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unfair) 것이 없노라”고 한다(마 20:13). 먼저 온 사람들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정확히 받았기 때문에 계약법적으로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문제는 마지막 사람에게도 같은 금액을 준 데 있다.
세상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기여한 만큼” 분배하는 비례적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새벽부터 온 사람들과 제11시에 온 사람들은 단순히 노동시간만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존재 조건 자체가 달랐다. 먼저 온 사람들은 건강하고 경쟁력이 있어서 일찍 선택받은 사람들인 반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사회적으로 뒤처져 하루 종일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만약 그들에게 시간 비례로만 임금을 지급한다면 그날 가족의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 노동자 한 가족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저 생계비에 해당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계산의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단순히 노동시간만 계산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절박함과 존재 전체를 보신 것이다. 가이사의 정의가 “기여한 만큼”의 정의라면, 하나님의 정의는 “살게 하는 정의”, “긍휼의 정의”까지 포함한다. 겉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한 데나리온을 주었지만, 실제로는 약한 자와 늦게 온 자의 결핍을 고려하여 “다른 것을 다르게” 대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고 선언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순서가 뒤바뀐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계산과 경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선포하신 말씀이다.
12사도 중의 한 사람인 마태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 취급받던 세리(稅吏)였다. 사도 바울 역시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에 평생 감격하며 살았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고, 언제나 자신을 “나중 된 자”로 여겼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먼저 된 자가 되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해서 전 인류의 스승이 되었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며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우리에게 남겼다.
가이사의 법은 계약과 비례, 절차와 적법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의 법은 사람의 중심(中心)과 은혜에 대한 감사, 그리고 청지기의 충성을 보신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한 경쟁 사회가 아니다.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비록 제일 나중, 제11시에 부름받았을지라도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면 그를 먼저 된 자로 세우신다.
세상은 “얼마나 먼저 왔는가”를 묻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감사하며 충성했는가”를 물으신다. 이것이 가이사의 정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공의이며,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리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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