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조슈아 리빙스턴의 기고글인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서는 슬픔을 끌어안아야 한다'(To heal from loss we must embrace grief to find new life)를 5월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조슈아 E. 리빙스턴은 프린스턴신학교 아시아계 미국인 기독교센터(Center for Asian American Christianity)의 ‘이매진 아더와이즈(Imagine Otherwise)’ 편집총괄을 맡고 있다. 또한 잉글우드 커뮤니티 개발 공사(Englewood Community Development Corporation)에서 교회·공동체 참여 담당 디렉터로도 사역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필자는 여전히 '아시안 아메리칸 기독교 센터(Center for Asian American Christianity, CAAC)'가 주최한 연례 정신 건강 콘퍼런스인 "우리의 번영, 우리의 신앙(Our Flourishing, Our Faith)"을 되새기고 있다. 이 행사가 정신적·정서적 웰빙을 아시안 아메리칸의 경험 및 기독교 신학과 엮어낸 참신한 방식도 인상 깊었지만, 필자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은 것은 '정신 건강'이라는 주제 자체가 태평양을 건너온 이주와 인종화라는 아시안 아메리칸의 고유한 경험을 대변하는 더 큰 신학적 형성(theological formation)의 틀 안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그 방식이었다.
매년 CAAC는 아시안 아메리칸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적 형성을 위한 커리큘럼의 뼈대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일련의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센터장인 데이비드 차오(David Chao) 박사는 이를 형성의 '세 개의 동심원'이라 부르며, 이는 매년 열리는 콘퍼런스의 순환 구조에 그대로 반영된다.
가족과 교회 생활에서 겪는 아픔과 압박감은 늘 아시안 아메리칸의 특수한 사회사적 맥락 안에서 고찰된다. 이주 과정에서 흔히 겪게 되는 트라우마적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희망이라는 틀 안에서 다루어진다.
이러한 커리큘럼의 뼈대는 매년 다음 세 가지 콘퍼런스를 통해 구현된다: ◆"우리의 번영, 우리의 신앙" (정신 건강 콘퍼런스)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신앙" (지역 사회사 콘퍼런스) ◆"아시안 아메리카의 성경 신학" (성경 신학 콘퍼런스)
이들은 단절된 개별 행사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세우고 점검하는 일종의 '삼위일체적 구조'로 기능한다.
지난달, 텍사스 달라스에서 넵시스 카운슬링(Nepsis Counseling)을 운영하는 공인 전문 상담사 상기타 S. 토마스(Sangeetha S. Thomas)의 기조 강연은 이 삼위일체적 구조를 아름답게 요약해 보여주었다. 그녀의 강연 제목은 "해결되지 않은 슬픔, 트라우마, 그리고 치유를 향한 여정"이었는데, 그녀 자신이 의도했든 안 했든 이 발표는 CAAC가 아시안 아메리칸의 신학적 형성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방식을 완벽하게 풀어냈다.
상기타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역사적 토대를 인정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서부 해안으로 이주해 온 희망적이면서도 무거운 역사적 대항 서사(counter-narratives)를 차분히 짚어 나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소수 민족학(ethnic studies)을 학문 분야로 창설하기 위해 일어났던 제3세계 해방 전선(Third World Liberation Front)의 학생 파업 (1968년)
2.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안 아메리칸 정신 건강에 관한 최초의 전국 콘퍼런스
3. 노예로 끌려와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에 시달렸던 필리핀, 인도, 중국인들의 역사
4. 시민권도 없이 철도 노동자나 농장 일꾼으로 일하기 위해 엔젤 아일랜드를 거쳐 들어왔던 1965년 이전의 이민자들
어쩌면 역사의 렌즈를 통해 공적 학문을 수행하는 트라우마 치료사로서 직면할 수 있는 반발을 예상했는지, 그녀는 해결되지 않은 균열은 오직 그러한 역사적 현실과 직접 마주할 때만 치유될 수 있음을 청중에게 상기시켰다.
슬픔에서 회복되려면 먼저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개리 오키히로(Gary Okihiro)의 명언을 떠올려 보는 것은 늘 유익하다. 그의 말을 의역하자면 이러하다. "아시아인들이 미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아시아로 간 것이다."
즉, 이 이야기는 단순히 아시아인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서사로 요약될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한계를 모르고 뻗어 나가 결국 아시아의 자원들을 자국을 위해 착취해버린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아시안 아메리칸 삶의 곳곳에 산재한 아픔과 압박감들이 왜 '트라우마'라는 단어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상기타의 강연은 신학적 깊이를 더한다.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온 이주를 설명하기 위해 시편 기자의 고백을 단순한 비유 이상으로 인용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시편 77:19). 이와 더불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이사야 43:2)는 말씀을 덧붙인다. 다시 말해, 슬픔을 신학적으로 다루는 과정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다.
평생 인도 정교회의 영향을 깊이 받아온 상기타는 우리에게 '친교(communion)'에 중점을 둔 신학을 제시했다. 하나님과의 친교, 서로 간의 친교,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친교가 그것이다. 하지만 상실을 통해 이러한 친교가 어떻게 균열을 일으키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고 느낄 수 있다.
강연에서 다뤄진 상실의 구체적인 형태로는 죽음(생명의 상실), 관계의 단절(함께함의 상실), 그리고 지워짐(유산의 상실)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시안 아메리칸이 겪는 경험의 징표들이다. 가족 간의 소외, 난민과 이주로 인한 상실, 인종화(racialization)로 인한 상실, 입양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인종화란 소수 민족의 특성을 이유로 고정관념을 씌워 개인이나 집단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종종 이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슬퍼하는 행위 그 자체가 슬픔으로부터 치유되는 길이라면, 우리 몸이 상실의 경험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혹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반응하는 몸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상기타는 "마음과 몸의 고통은 표현되어야 하고, 목격되어야 하며, 관계 속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상실이 한 민족의 정체성 상실일 때 이는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오며, 이는 일종의 '이주적 애도(migratory grief)'의 형태를 띤다.
처리되지 않은 슬픔과 트라우마는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습된 행동을 통해 표출될 때, 세대를 이어가는 저주처럼 대물림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시안 아메리칸, 더 나아가 그 누구든 건강하게 슬퍼하는 과정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승자만을 칭송하는 세상에서, 치유를 가로막는 것은 다름 아닌 '상실을 올바로 처리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여기서 상기타는 통합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슬픔이 어떻게 기쁨의 문을 여는지 보여주었다. 상실을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내재된 것으로 특징지은 것이다. 이를 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는 고백과 같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는 눈물 흘리는 나무에 매달리셨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가 된 바로 그 나무조차 상실을 애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끔찍한 트라우마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우리가 슬퍼하는 방식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만약 "마음과 몸의 고통이 표현되고, 목격되며, 관계 속으로 들어와야 치유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예수님이 피할 수 없었던 잔, 즉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신 주님의 몸에서 가장 선명하게 증명된다.
모든 피조물의 치유는 당신과 필자의 치유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죽음 그 자체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이의 시간을 묵상하는 부활절 기간에 아름답게 그려진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침묵과 자기 비움을 통해 영적 형성의 모범을 보이시는 것을 목격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시편 77:19)를 몸소 구현하시고,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이사야 43:2)는 약속을 확증하시는 주님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CAAC의 사명을 뒷받침하는 치유와 온전함에 대한 복음의 약속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에베소서 2:14). 우리가 각자의 상실을 마주할 때 거울처럼 비춰보아야 할 분이 바로 이 평강의 주님이시다.
우리에게 정신 건강은 단순히 최상의 자아를 가꾸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트라우마를 동반하는 이주 패턴과 인종화로 인해 균열이 생긴 세대 간 가족의 아픔과 압박감을 결코 외면하지 않겠다는, 지극히 깊은 신앙적 순종의 행위다.
이사야 61장 3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애도의 과정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기쁨의 문을 연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