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로를 살리는 신앙의 비밀
본문
빌립보서 2장 1–11절
서론
신앙의 공공성, 사람을 살리는 에너지
신앙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마음의 평안을 얻는 수양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생명의 통로’ 삼아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상처 입은 자를 회복시키며, 깨어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생명의 정거장’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거친 풍파 속에서 치이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숨을 쉬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에스겔 37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생기가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자, 그것들이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더 큰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 들려올 때 우리는 멈춰 서야 합니다. 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곳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디모데후서 3장 5절의 경고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핵심인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열심은 있으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종교적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서로를 살리는 신앙의 비밀’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 영혼의 엔진을 교체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은혜의 기억이 낳는 하나 됨의 열매 (빌 2:1–2)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하나 됨을 요청하기 전, 1절에서 우리가 이미 받은 네 가지 은혜를 소환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 압도적인 은혜를 경험한 자라면 마땅히 피워내야 할 열매가 바로 ‘하나 됨’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시선의 일치): 인간은 저마다 자라온 환경과 가치관이 다릅니다. 생각의 일치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방향의 일치’는 가능합니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각자의 고집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한 지점에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시편 133편 1절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합니다. 이 연합은 억지로 묶어놓은 결박이 아니라, 지휘자의 손끝을 바라보는 오케스트라처럼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할 때 일어나는 거룩한 화음입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무차별적 사랑): 세상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랑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조건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감정에 의존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지적 사랑이 공동체를 살립니다.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 (영적 리듬의 조화): 이는 성령의 지휘 아래 나의 개성을 녹여내는 과정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고 공동체라는 아름다운 화음을 위해 내 소리를 조절하는 겸손입니다. 내 목소리가 너무 크면 화음은 깨집니다. 내가 조금 낮아질 때 공동체는 비로소 천국의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2. 자기중심성이라는 우상을 파쇄하는 겸손 (빌 2:3)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주범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뿌리 박힌 ‘자기중심성’이라는 암세포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나’로 이동했을 때 나타나는 영적 질병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내가 중심이 되어 판단하고, 내가 기준이 되어 사람을 평가하며, 내가 만족해야 관계를 유지하려는 상태입니다. 바울은 이 뿌리 깊은 문제를 단 두 단어, ‘다툼’과 ‘허영’으로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다툼과 허영의 실체: 여기서 ‘다툼’은 단순히 큰 소리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원어로 ‘이기적인 야망(Selfish Ambition)’을 뜻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 이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경쟁심이며, 하나님을 위한 열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입니다. “내가 맞다”, “내가 더 옳다”, “내 방식이 더 낫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 순간 공동체는 이미 분열의 씨앗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영향력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 다툼의 본질입니다.
‘허영’은 내용 없는 껍데기 영광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비어 있는 상태이며,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왜곡된 자아입니다. 잠언 16장 18절 말씀처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는 경고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영적 경고입니다. 인정에 목말라하는 허영이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비교와 시기, 경쟁과 소외라는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누구는 더 인정받고, 누구는 덜 인정받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관계는 점점 왜곡되고, 결국 상처와 분열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상처받는 이유도 이 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기대한 만큼 인정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 안의 자기중심성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을 탓하게 되고, 공동체는 반복해서 무너지게 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신앙적 상상력: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남의 단점을 찾아 나를 높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 자신을 지키고, 평가를 통해 우위를 확보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흐름을 정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라고 요구합니다.
복음의 안경을 쓰고 형제를 보십시오. 주님이 저 영혼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그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 서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가볍게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10절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존중해주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 상상력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이 시선이 열릴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세워가야 할 존재로 보게 됩니다.
결국 겸손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나를 낮추는 느낌이 들지 않아도, 상대를 높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옳아도 물러설 수 있는 힘,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이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놀랍게 변화됩니다. 다툼이 사라지고, 비교가 멈추며, 서로를 세우는 생명의 흐름이 시작됩니다. 자기중심성이라는 우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3. 시선의 혁명, ‘나’에서 ‘너’로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바울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영적 균형을 말씀합니다. 신앙은 무책임이 아닙니다. 내게 맡겨진 직무와 가정, 내 삶의 자리를 성실히 지키는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신앙은 공허한 이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무시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 속에서 신앙이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실함은 신앙의 기초이며, 책임은 신앙의 토대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을 넘어, 시선을 밖으로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의 깊이가 갈립니다.
영적 안테나를 확장하십시오: 살리는 신앙은 시선의 반경을 넓히는 것입니다. 형제의 아픔과 필요를 유심히 살피는 ‘스코페오(skopeo)’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본다’는 의미를 넘어, 집중하여 주의 깊게 살피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무심히 지나치는 시선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시선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스쳐 지나갑니다. 같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서로의 마음 상태를 알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리는 신앙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기 시작합니다. 표정 뒤에 숨겨진 마음을 읽고, 말하지 못하는 신호를 감지하는 영적 민감성이 생깁니다.
오늘날의 ‘각자도생’ 논리가 교회 안에 침투하면 교회는 차가운 건물이 됩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성숙이라고 착각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의 삶에 들어가는 곳입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시간을 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곳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기 시작할 때 그곳은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은 단순한 물리적 부담이 아니라, 감정의 무게, 관계의 아픔, 인생의 고통까지 포함합니다. 그 짐을 함께 짊어질 때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타인의 필요를 나의 우선순위로: “저 사람이 오늘 왜 예배 중에 눈물을 흘렸을까?”, “저 지체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위로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내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삶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길입니다. 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더 이상 나의 만족과 나의 필요가 중심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과 필요가 나의 기도가 되고 나의 관심이 됩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나에게 집중하도록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살피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필요를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을 반복할 때, 우리의 내면은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됩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할 때, 그 희생의 토양 위에서 생명의 싹이 돋아납니다. 희생은 손해가 아니라 생명을 낳는 씨앗입니다. 내가 시간을 내어줄 때 누군가는 회복되고, 내가 마음을 열어줄 때 누군가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실제입니다.
결국 시선의 변화는 존재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너’ 중심의 삶으로 이동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사셨습니다. 배고픈 자를 보셨고, 병든 자를 보셨으며, 울고 있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선을 우리가 품을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개인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살아 있는 복음이 됩니다. 시선이 바뀌면 공동체가 바뀌고, 공동체가 바뀌면 교회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언제나 한 사람의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4. 엔진의 교체,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빌 2:5)
바울은 이제 신앙의 가장 깊은 뿌리, 즉 '영적 엔진'을 교체하라고 명령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신앙은 ‘행위’ 이전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은 채 하는 봉사는 결국 자기 의가 되거나 금세 지쳐 원망으로 변합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처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겉모양만 거룩한 척하는 종교 놀이를 멈추고,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이라는 엔진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과 겸손이라는 에너지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옵니다.
이식받는 마음: “이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내 노력으로 짜내는 성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부어지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의 포도나무 비유처럼,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을 때 그분의 성품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이식됩니다. 내 본성이 죽고 예수의 생명이 나를 주관하게 하는 것입니다.
5. 낮아짐의 사다리와 성화의 길 (빌 2:6–18)
6절부터 11절은 이른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낮아지셨는지를 보여주는 이 여정은 우리가 왜 낮아짐의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놀라운 신학적 선언을 단순한 교리로 끝내지 않고, 12절 이후에서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매우 실제적으로 연결해 줍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낮아짐은 단순히 우리가 감동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 비움 (Kenosis, 6-7절): 주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처럼, 부요하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은 그 가난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 자기 비움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려놓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비움이 곧 채움의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내 권리와 체면, 내 자존심을 비우지 못하면 결코 형제를 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붙들고 있는 한, 다른 사람을 품을 공간은 생기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 비움은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며, 공동체를 살리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죽기까지의 순종 (8절): 주님은 사람이 되신 것에 그치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수치와 저주의 정점이었습니다. 가장 억울하고, 가장 비참하며,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진짜 순종은 내가 대접받을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머무는 것이 진짜 순종입니다. 우리는 쉽게 반응하고 쉽게 판단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반응이 아니라 인내였고, 판단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이 십자가의 마음으로 낮아질 때, 어떤 상처도 치유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모든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반전 (9-11절): 이것이 하늘의 법칙입니다. 내가 나를 높이면 공동체는 병들지만, 내가 나를 낮추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십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높아지기 위해 애쓰지만, 하나님은 낮아지는 자를 높이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와 완전히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낮아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영광으로 연결됩니다.
이제 바울은 이 위대한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끌어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삶으로 드러내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낮아짐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망을 버리십시오 (14절): 원망은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입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를 가장 빠르게 무너뜨리는 독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원망하다가 멸망했습니다(고전 10:10). 원망은 단순히 환경에 대한 불평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영적 교만’입니다.
원망이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원망이 많아질수록 공동체는 무거워지고, 감사가 사라질수록 관계는 점점 메말라갑니다.
시비를 버리십시오 (14절): 시비는 내 판단을 절대화하여 끊임없이 논쟁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를 꺾으려는 마음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3절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종종 옳은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는 것이 복음입니다.
원망과 시비는 자기중심성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중심에 있을 때 원망이 나오고, 내가 기준이 될 때 시비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원망은 감사로 바뀌고, 시비는 이해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이 독소들을 제거하고 묵묵히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늘의 별들’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15절). 세상은 우리의 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원망을 이겨내고 보여주는 ‘사랑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결국 낮아짐은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능력이며, 성화는 개인의 성장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비하를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는 반드시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
당신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가 되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건물도 조직도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사람’이며, 그 교회 된 우리가 서로를 살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가운데 실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말로만 고백하는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결국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 고백은 화려한데 정작 내 곁의 가족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있고, 내 곁의 지체가 나 때문에 교회 오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며, 이해가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지가 곧 우리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한마디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의 말씀처럼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난은 영혼을 무너뜨리지만, 격려는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우리가 건네는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살아갈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언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다림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의 말씀처럼 사랑은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쉽게 판단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기도하며 기다려 주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듯이, 우리 역시 누군가를 끝까지 붙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서로를 살리는 신앙의 비밀을 삶으로 증명해 내며,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로는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삶으로는 상처를 주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주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 주옵소서. 허영과 고집을 내려놓고 형제를 나보다 귀하게 여기는 눈을 열어 주시며, 우리 입술에서 원망과 시비를 제하시고 사랑의 말만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와 가정이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세상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