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인가 집착인가: 그리스도인이 경계해야 할 영적 함정

티시 캐넌 작가. ©teasicannon.com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티시 캐넌의 기고글인 '어둠을 드러냄’과 ‘어둠을 소비함’ 사이: 모든 성도가 분별해야 할 경계선’(Exposing darkness or consuming it? The thin line every Christian must walk)를 4월 2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티시 캐넌은 작가이자 강연가이며 ‘트루 컴포트(True Comfort) 팟캐스트’의 진행자이다. 그는 평생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향한 건강하고 지속적인 헌신을 세워가도록 돕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논란과 음모론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자신들만 숨겨진 진실을 보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이들이 놓쳤다고 생각한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려 했다.

새로운 것은 그런 주장들의 양과 확산 속도다. 오늘날 뉴스 피드나 소셜미디어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충격과 분노를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밀려온다. 마치 끊임없는 폭로의 홍수 속에 사는 듯하다.

여러 플랫폼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숨겨진 부패를 폭로하는 일을 중심으로 막대한 추종자를 모아왔다. 그런 주장들이 호응을 얻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실제로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진실이 가려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고 교우들에게 “어둠의 열매 없는 일들을 책망하라”(에베소서 5:11)고 권면했다. 분명 거짓과 악을 드러나고 진실 말하는 자리가 때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어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직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이것은 부르심인가, 아니면 욕망인가?"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패를 조사하고 폭로하도록 부르신 사람들이 있다. 바로 기자들, 변호사들, 인권 옹호자들, 내부 고발자들이 그런 경우일 수 있다.

그런 부르심이 있다면 담대하고 신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일로 부름받았다기보다 그것에 끌리고 있다. 이 말은 악을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에 의해 형성되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복해서 머무는 것은 단지 정보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빚어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또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립보서 4:8).

그것이 존귀한가, 의로운가, 정결한가, 사랑할 만한가, 칭찬할 만한가를 묻는다. 그런데 어떤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평안과 의로움보다 불안, 의심, 분노를 낳는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 분별에서 소비로 넘어갔다. 이제는 무엇이 잘못인지 식별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에 머무르고, 반복해서 되새기고, 분석하고, 심지어 그 주변에 분열적 충성심까지 세운다. 이는 관심 수준을 넘어 추측과 분노, 때로는 비방으로 이루어진 독성 식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현대 뇌과학도 이를 뒷받침한다. 뇌는 반복되는 생각과 입력에 따라 계속 재구성된다.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특정 사고 패턴이 점점 자동화된다. 심리학자 도널드 햅(Donald Hebb)은 “함께 발화하는 세포는 함께 연결된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것은 우리의 생각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까지 바꾼다.

그래서 정직한 질문이 필요하다: 지금 내 마음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나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끄는가, 아니면 그분에게서 시선을 빼앗는가? 이것이 성령의 열매를 더 맺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낳고 있는가? 그리고 솔직히 말해, 예수께서 이런 것들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현실을 회피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실 말하기를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우리가 무엇을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려는 것이다.

의심과 자극, 추측으로 가득한 콘텐츠에 계속 잠기면 어쩌면 거기에 일부 진실이 있다 해도 결국 분별보다 비판적인 사람이 되고, 평안보다 예민해지며, 지혜보다 의혹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의심은 모호함 속에서 자란다. 빈틈을 추측으로 메우고 실제 아는 것 이상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지혜나 용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심이 기본 태도가 되면 세상을 보는 방식뿐 아니라 사람들과 공동체를 대하는 방식까지 왜곡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부패를 드러내지 않으셨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은 담대하게 나아가셨는데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억압을 직면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 중심은 부패 추적이 아니었다. 의심과 공포, 냉소 위에 플랫폼을 세우지 않으셨다 분명한 죄를 직면시키셨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 나라로 돌리셨다. 예수님은 회복을 위해 부패를 드러내셨다.

우리는 종종 폭로 자체를 목적처럼 여긴다. 끊임없이 자극적인 콘텐츠를 먹고 살면 우리는 늘 잘못된 것을 찾는 사람으로 형성될 수 있다. 때로 이 방법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얼마나 정확했느냐로 신실함을 평가하지 않으신다. 마음의 상태(고린도전서 13장), 삶의 열매(갈라디아서 5장),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정신의 변화(로마서 12:2)로 보신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둠 속에서 어떻게 신실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부패한 지도자들과 거짓 선지자들 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어둠 자체에 집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고 그 말씀이 그의 메시지와 담대함을 형성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추적하는 데 사역의 중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 두었다.

만약 우리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빚어가는 것들로 돌린다면 어떨까? 분명하고 신실한 성경 가르침, 깊이 있는 신학, 믿음을 세우는 변증들, 무너진 것만 드러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참된 것을 세우는 목소리들로 돌린다면 더 큰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이런 시대를 살아갈 준비도 훨씬 더 잘 갖추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분노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화해의 사역자로 부름받았다. 물론 하나님은 때로 어둠을 드러내셔서 맞서게 하신다. 그럴 때는 담대히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악은 우리가 속지 않도록 보여주실 뿐, 거기에 몰두하라고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하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지혜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라고 초대하시고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야고보서 1:5). 분열과 분노가 시대정신처럼 된 세상에서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진리와 은혜, 지혜와 자비, 소망,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뿌리내리지 않은 어둠 폭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형상으로의 변화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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