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피터 데모스의 기고글인 ‘서구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이란인들에 대한 잘못된 믿음’(This myth about Iranians that Western Christians believe)을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피터 데모스는 ‘Uncommon Sense in Current Times’(현시대의 비정상적인 상식)의 진행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잠시만 온라인을 둘러보면 익숙한 장면들을 보게 된다. 초록색 머리를 한 논바이너리 목사, 무지개 깃발로 장식된 예배 공동체, 그리고 문화를 따라 재해석된 성경.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한 반응이 있다. 보수적 그리스도인이 등장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런 장면들은 비교적 분명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젊은 세대들조차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러나 바이럴 되지 않는 더 깊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더 조용하고, 더 발견하기 어려우며, 훨씬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기독교의 왜곡이 아니라 희석이다.
필자는 신앙적으로 보였던 교회에서 성장했다. 목회자는 세련되었고 설교는 체계적이었다. 메시지는 거의 불편함을 주지 않았다. 자세히 들어보면, 설교의 내용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중요한 것은 설교에서 말해진 내용보다 말해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주 들었다. 친절하고 인내하며 용서하라는 가르침도 익숙했다. 그것들은 분명 성경적인 명령이며 어느 그리스도인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일상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절제와 순종, 회개에 대해서 훈련받지 못했다. 주일에 들은 말씀이 월요일의 결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배우지 못했다. 무엇보다 신앙이 진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진리가 탐구되고 변증될 수 있고 확신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필자는 교회를 떠났다. 기독교를 깊이 검토한 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분명한 순서를 제시하신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순서가 약화되거나 뒤바뀔 때, 겉으로는 자비로워 보이지만 깊이가 부족한 기독교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을 격려는 하지만 준비시키지 못한다. 교회는 결국 십자가가 달린 봉사 단체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
신약성경은 단순한 격려를 넘어 성도의 형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교회가 조용히 간과하는 전제가 있다. 제자훈련은 의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바쁘고 친절하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사명을 놓치게 된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경고는 우리를 멈추어 생각하게 한다. 두 그룹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이는 말에 있지 않고 삶의 실제 모습에 있다. 한쪽은 진정한 순종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다.
이 경고는 분명히 잘못된 길에 있는 사람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단지 교회 가까이에 있고 기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교회는 이단을 피하면서도 제자를 세우는 데 실패할 수 있다. 설교 내용은 정확하지만 삶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의 우선순위를 놓친 채 이웃 사랑만 강조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격려를 받지만 성장의 도전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모습은 영적인 표류를 낳는다. 바퀴 정렬이 맞지 않은 자동차처럼 처음에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방향이 어긋난다.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진리 위에 충분히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압력이 올 때 버티지 못한다. 결국 길을 벗어나면서도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문화의 압력이 커질 때 그들은 서 있지 못한다. 떠나게 된다. 대부분은 조용히 신앙에서 멀어진다. 때로는 필자처럼 기독교가 효과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던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 줄어드는 것도, 단순히 사랑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 올바른 질서 속에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분명하게 가르쳐지고 실제로 살아지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이다.
우리는 훈련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믿음과 삶을 연결해 주는 교회가 필요하다. 예배당 밖의 현실 속에서 살아갈 준비를 시키는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가 필요하다.
교회의 가치는 헌금의 규모나 세례의 숫자, 예배 횟수나 봉사 활동의 양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교회가 성도들을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잘 살아가도록 형성시키는지가 진정한 기준이다.
기독교의 분명한 왜곡은 언제나 주목을 받는다. 그것은 발견하기도 비판하기도 쉽다. 그러나 더 조용한 실패는 훨씬 발견하기 어렵다. 그것은 익숙해 보이고 안전하게 들리며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을 형성하지 못하고 준비시키지 못하며 굳게 서게 하지 못한다면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방향을 다시 바로잡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