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말: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굴복다'(Dear pastors: When your silence is not neutrality. It is surrender)를 3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드라마 「House of David」의 한 장면을 보던 중, 필자는 성경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닌 장면 가운데 하나로 다시 이끌렸다. 바로 다윗이 골리앗과 마주했던 순간이다.
그 전쟁터에서 골리앗은 단순히 거대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노골적인 도전 그 자체였다. 그는 날마다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했다. 그의 거대한 체구와 갑옷, 우렁찬 목소리와 압도적인 존재감은 한 가지 메시지를 외치고 있었다.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할 수 없다.”
한동안 그 메시지가 사실처럼 보였다.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움에 떨었고,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심지어 왕조차도 그러지 못했다.
그때 다윗이 등장한다. 그는 목동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갑옷도 없었고, 칼도 없었으며, 전쟁 경험도 없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거인과 히브리인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자와 하나님 사이의 대결이었다.
다윗은 이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입에서 구원을 경험했던 그는, 그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자신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비웃었다. 이스라엘이 전사를 보내지 않고 소년을 보냈다는 사실이 모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께서 더 크신 일을 이루고 계셨다. 목동의 물맷돌에서 날아간 단 한 개의 돌로 거인이 쓰러졌다.
골리앗의 분노와 모독, 그리고 거대한 위협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도구가 되었다. 인간의 교만한 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약화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더욱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의 분노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성경은 이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염이 주를 찬송하게 되며 그 남은 노염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편 76:10).
시편 76편은 어떤 반대도 결국 하나님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원수들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반역조차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반항에 한계를 두시고, 그 저항조차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 진리는 고대 전쟁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하나님을 향한 도전은 더 이상 은밀하지 않다. 그것은 공개적이며 조직적이고, 심지어 찬양받기까지 한다. 성경적 진리는 조롱받고, 도덕적 절대 기준은 비웃음을 당한다. 생명, 가정, 진리, 인간의 정체성과 같은 근본적인 가치들이 공격받고 있다.
마치 골리앗이 다시 계곡에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많은 경우 교회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주저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논쟁을 두려워하고, 어떤 이들은 분열을 우려하며, 또 어떤 이들은 이러한 주제가 복음 사역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의 모습과 시편 76편은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어떤 순간에는 침묵이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항복이다.
다윗은 골리앗의 도전이 단순한 정치적 혹은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영적 도전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그 도전에 동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나아갔다. 그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역시 이러한 열정과 확신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의 도덕적, 문화적 문제를 말하는 것은 복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선포한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면, 그분의 권위는 삶의 모든 영역, 공적 영역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행동한다. 어떤 반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말한다.
아무리 거세 보이는 인간의 분노라도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단지 성경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약 30년 전,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어긋나는 정치적·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던 도덕적 혼란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한 메시지를 강단에서 전할 경우 목회 사역이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에스더의 고백처럼 결심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필자는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성경적 관점에서 오늘날 논쟁이 되는 윤리적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목적은 분열이 아니라 제자훈련이었고, 논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혼란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사람들은 이러한 설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현실의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듣고 싶어 했다. 교회는 성장했고,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왔다. 글을 쓸 기회가 열렸고, 라디오와 강연 사역으로 이어졌다.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었던 다양한 사역의 문이 열렸다.
필자는 스스로 위대한 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정규 신학 교육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영광을 위해 영향력을 넓혀 가셨음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사역을 무너뜨릴 것 같았던 일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역을 세우시는 도구가 되었다. 물론 반대와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반대 역시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었다.
사람의 분노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큰 부담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 교단들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이 너무 커 보이고, 대가가 너무 크다고 느껴진다. 경력과 명성, 교회의 안정이 한쪽 저울에 놓이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선포하는 충성이 다른 한쪽에 놓인다.
그 결과 종종 침묵이 선택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은 단순한 도전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골리앗과 같다.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노골적인 적대이며, 교회의 증언을 약화시키고 사회의 근본적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위협이다.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 군대처럼 뒤로 물러서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여전히 작고 연약해 보이는 것을 사용하여 강해 보이는 것을 무너뜨리신다.
문제는 거인이 분노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 분노하고 있다. 문제는 다윗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누가 일어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선포할 것인가?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시편 76편의 말씀이 참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했던 반대는 결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인들의 분노조차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분노마저 자신을 찬양하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