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은 나를 설명하지만, 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당신의 성격 유형은 무엇인가’(What is your personality type?)를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상담 현장에서 누군가가 “이건 그냥 제 성격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을 얼마나 자주 마주했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어떤 이들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하지만, 더 많은 경우 체념에 가까운 어조로 이 말을 꺼낸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검사를 해 보았다. 자신의 유형과 숫자, 알파벳을 알고 있으며, 왜 갈등을 피하는지, 왜 과도하게 생각하는지, 왜 마음을 닫는지, 왜 지나치게 밀어붙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성격 유형을 이해하는 일에는 분명 가치가 있다. 성격 이론은 한때 혼란스럽게 느껴졌던 행동 패턴에 언어를 제공하고, 경험을 정리하며,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표현 체계를 만들어 준다. 치료 현장이나 강의실, 리더십 세미나뿐 아니라 특히 소셜미디어에서는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체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기 시작했다.

필자 역시 심리학자로서 이러한 도구들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그 매력을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눈에 잘 띄지 않는 또 다른 흐름도 지켜보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범주가 어느 순간 경계를 긋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설명으로 시작된 것이 점차 허용이나 제한이 되어 버린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나는 그런 쪽으로 타고나지 않았어요.” “그건 내 유형이 아니에요.”

그 과정에서 질문은 조용히 바뀐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라는 질문이 어느새 “이게 바로 나다”라는 결론으로 이동한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변화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정체성이 성격에 고정되는 순간, 성장은 선택 사항처럼 느껴지거나, 심지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성격이 설명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격의 일부 요소는 분명 태어날 때부터 존재한다. 정서적 기질, 기본적인 에너지 수준, 민감성 등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드러난다. 어린아이들에게서도 삶의 경험이 충분히 쌓이기 전부터 이러한 기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기질은 출발점일 뿐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삶이 만들어 간다.

가정환경, 상실의 경험, 상처, 관계의 역사 등은 우리 안에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과 반응하는 방식, 어려움을 견디기 위한 전략을 만들어 간다. 그것은 항상 성장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많은 경우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갈등을 피하는 사람은 과거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을 때 상처를 경험했을 수 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사람은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감정을 닫아 버리는 사람은 감정이 안전하지 않았던 시간을 지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복된 방식은 점차 성향이 되고, 그 성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체성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격 이론은 우리를 미묘하게 오해로 이끌 수 있다. 성격 이론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는지를 설명해 줄 수는 있지만, 그 행동이 진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 지혜의 결과인지, 아니면 상처의 흔적인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는다.

성경을 펼쳐 보면 강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모세는 주저하고 저항하는 인물이었고, 다윗은 열정적이며 예술적이지만 동시에 깊은 결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대담했지만 일관되지 못했으며, 예레미야는 섬세하고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인물이었다. 바울은 강렬하고 추진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 다양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유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어떤 심리적 틀 속에 neatly 정리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성격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침묵은 오히려 더 두드러진다. 성경은 사람의 성격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을 중심에 두지도 않는다. 대신 마음과 영혼, 행동 아래에 놓여 있는 더 깊은 상태를 바라본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 속에는 공통된 흐름이 있다. 바로 인간의 깨어짐이다.

다윗의 용기는 도덕적 실패와 함께 등장한다. 모세의 지도력에는 분노가 동반된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압박 속에서 무너진다. 바울에게는 제거할 수 없는 ‘가시’가 있다. 어떤 성격도 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타고난 재능이나 강점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타락한 세계의 균열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성격 이론이 각 사람의 독특함을 강조한다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드러낸다.

현대 심리학은 주로 분류에 관심을 둔다. 당신은 어떤 유형인가, 어느 스펙트럼에 위치하는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묻는다. 이는 설명의 과학이다. 그러나 성경은 방향에 더 큰 관심을 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고정된 존재로 보지 않고, 변화되고 형성되어 가는 존재로 바라본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린도후서 3:18). 신앙의 삶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나는 원래 이렇게 타고났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되묻는다.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더 큰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깊은 자기 보호를 향하고 있는가. 겸손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교만을 강화하고 있는가. 진리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정교한 회피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설명이 아니라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사람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바울 역시 박해자로 남지 않았다. 다윗도 자신의 용기나 실패만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은 중요했지만, 그것이 결론은 아니었다. 그들은 새롭게 빚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문화는 정체성에 이르는 단순한 길을 제시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패턴을 이해하며, 자신의 유형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자기 이해는 분명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과정에 중요한 경고를 덧붙인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9). 이것은 자기 성찰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한계를 경고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자신을 항상 정확하게 보지 못한다. 동기를 오해하기도 하고, 실제로 변화가 필요한 패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설명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변화에는 저항할 수도 있다. 성격 이론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다루기 어렵다. 우리의 경향을 이해하도록 돕지만, 그 경향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편 139:1). 자기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이해가 출발점이 된다. 진정한 자기 이해는 끝없는 자기 탐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 밖에 계신 분에 의해 알려지고 평가받을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우리의 일반적인 정체성 이해와 충돌하는 선언이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이것은 자기 표현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언어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우리의 성향이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기질이 순종을 어렵게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형이 사랑보다 자기 보호를 강화한다면, 혹은 교만이나 회피, 통제를 강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격 이론은 여기에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

복음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문제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시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것은 성격을 다듬는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이다. 그 변화의 증거는 성격 프로필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사랑과 기쁨,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 5:22-23)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단순한 범주로 축소하지 않으신다.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대담하고 누가 신중한지, 누가 깊이 느끼고 누가 천천히 사고하는지 하나님은 모두 아신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을 동일한 목적지로 부르신다. 자기 자신을 더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부르신다.

다윗은 특정한 성격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도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어서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바울 역시 기질이 적합했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름을 받았고, 도전을 받았으며, 변화되었다. 이것이 반복되는 패턴이다. 성격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말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결론 내리고 싶어 한다. “이게 바로 나다.” 그러나 성격이 정체성이 되는 순간 변화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성장은 조용히 멈춘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야기는 그와 같은 최종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패턴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가 아니다. 우리의 기질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형성되고 있는 존재다.

결국 성격은 유용한 렌즈가 될 수 있다.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의 무게를 감당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 역할은 다른 곳에 속해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복된 소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형이 아니다. 우리의 숫자가 아니다. 우리의 패턴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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