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정치적 분열이 교회 안의 관계들을 무너뜨리고 있다'Political division is ruining relationships in the Church)를 최근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미국을 갈라놓고 있는 것은 단지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깊고, 훨씬 오래되었으며, 훨씬 더 중대한 문제다. 우리는 지금 도덕적 파열을 목도하고 있다.
최근 지인의 한 친구가 문자 메시지로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 이유는 그의 ‘공화당적 가치관’이었고, 그 가치는 “비신앙적”이라고 규정됐다. 상대방은 증오감은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관계는 거기서 끝이었다. 휴대전화 화면 위 몇 줄의 문장으로 오랜 우정이 종료된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점점 더 흔해지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국가적 분열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은 본질적으로 정당이나 정책의 경쟁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권위에 대한 충돌이다. 한쪽은 도덕적 진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되어 성경 안에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반면 다른 한쪽은 도덕적 진리를 인간이 구성하고, 유동적이며, 문화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 갈림길의 결과는 이미 공적 삶의 거의 모든 주요 논쟁을 지배하고 있다. 결혼과 성, 인간 생명의 존엄성, 가족의 정의, 인간 본성, 그리고 진리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성경은 이 순간을 이미 경고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이사야 5:20). 이 가치 전도는 더 이상 이론적 문제가 아니다. 제도화되고 있다. 오랜 도덕적 경계선들은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고 있으며, 역사적 기독교 가르침을 지키는 이들은 위험하거나 편협하거나 시민사회에 부적합한 존재로 묘사된다.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전통적 신앙과 도덕적 절대성을 지닌 사람들과 단순히 ‘의견이 다르다’는 수준을 넘어, 관계를 끊고 어떤 경우에는 적대시하도록 부추김을 받고 있다.
1858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일리노이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분열된 집은 설 수 없다.” 링컨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당 정치 자체를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자명한 진리와 노예제라는 제도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도덕적 소외를 진단하고 있었다. 자유에 헌신한 절반과 속박에 헌신한 절반으로 나뉜 국가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하나의 윤리적 비전이 다른 하나를 압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이다.
그의 진단은 옳았다. 그 분열은 예의 바른 토론이나 절차적 타협으로 치유되지 않았다. 오히려 굳어지고 심화되었다. 결국 내전이라는 파국으로 나라를 찢어놓았다. 링컨의 경고는 모든 세대에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무엇이 도덕적으로 참된 것인지에 대해 더 이상 합의하지 못할 때, 그 사회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세계관의 충돌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는 생명의 모든 단계가 고유한 존엄을 지닌다는 것, 결혼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있다는 것, 종교적 신념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진리는 끝없이 협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기초는 노골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링컨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 결과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불안정이다.
그러나 문화적 충돌이 현실이고 도덕적 긴장이 극도로 높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대응은 이 시대의 정신과 달라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신념을 내려놓지 않으며,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타협 없이, 그러나 원한 없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든다.
예수님은 도덕적 명확성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지만, 그분을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물러서지도 않으셨다. 진리를 분명히 말씀하셨고, 동시에 끝까지 사랑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에베소서 4:15). 이 균형은 약함이 아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강함이다.
내 친구가 겪은 그 문자 메시지 사건의 비극은 단순히 한 관계의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관용이 정치적 부족주의로 대체되고, 인간 존엄성이라는 공통분모보다 이념이 우위에 놓이며, 이제는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이 의로움의 기준이 되었다는 조용한 전제의 확산이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교회는 도덕적 폭풍 속에서 파벌로 숨어들거나 문화의 적대감을 그대로 따라 하며 길을 찾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위에 흔들림 없이 서되,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도 은혜를 확장함으로 이 험한 지형을 건너간다. 참된 기독교는 불일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절에 원망으로 응답하지도 않는다. 화해가 대가를 요구하는 순간에도 화해의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길은 좁지만 분명하다. 성경적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충성, 그리고 그 진리를 오해하고 반대하며 거부하는 이들까지도 향한 그리스도 닮은 사랑에 대한 흔들림 없는 헌신이다.
이 증언은 때로 아주 단순한 답장 하나로도 나타난다. 친구는 그 슬픈 문자를 받고 큰 상심에 빠져 나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장을 보내보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느끼신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진심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사안에서 생각이 달랐지만, 함께 나눈 시간과 우정을 저는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우리의 차이가 인간적인 연결마저 지워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공감하는 삶의 영역도 있고, 언젠가 서로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진심으로 잘 되시길 바랍니다. 혹시 다시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를 위해, 제 문은 언제든 열어두겠습니다.”
세상이 갈라져야 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께 속해 있는지를 잊었다는 말만은 듣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