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기독교인들은 매우 미신적인가?’(Are Christians very superstitious?) 1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클래식 록을 주 장르로 연주하는 베이스 기타 연주자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필자를 향해 “악마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문제 삼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이 무엇을 연주하고 무엇을 연주하지 않는지에 대해 영적으로 분별하고 있으며, 실제로 상당한 분량의 기독교 음악도 알고 있고 연주한다.
그러던 중 며칠 전, 스티비 원더의 노래 ‘Superstition’을 연주하게 됐다. 이 곡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벽에 쓰인 아주 미신적인 글들 아주 미신적인 생각들, 사다리가 곧 쓰러질 것 같고 열세 달 된 아기가 거울을 깨뜨렸네 7년간의 불운, 좋은 일은 이미 지나갔지" 그리고 이어서 스티비 원더는 이렇게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으면 결국 고통을 겪게 된다 미신은 길이 아니다."
이 조언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삶이 가르쳐 주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잘못 믿은 것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왜 믿고 실천하는지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는 종교적 신앙을 포함해 삶의 모든 영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종교, 특히 기독교에 비판적인 이들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종교를, 그리고 기독교를 공포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미신 체계로 간주한다. 거울이 깨질까 봐 조심하고, 숫자 13을 피하고, 사다리 아래를 지나가지 않는 미신적 사람들처럼, 종교인들도 신을 노엽게 할까 두려워 끊임없이 의식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며 신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마르스 힐)에서 설교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 17:22). 일부 성경 번역본은 여기서 ‘종교성이 많다’는 표현을 ‘미신이 많다’로 번역한다. 이어 바울은 “너희가 섬기는 대상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보았다”(23절)고 말한다. 이는 아덴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한 어떤 신이라도 혹시나 놓쳐서 화를 입을까 두려워 제단을 세운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웹스터 사전은 바로 이런 태도를 ‘미신’으로 정의한다: “무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 마술이나 우연에 대한 신뢰, 잘못된 인과관계 이해에서 비롯된 믿음이나 관행. 초자연, 자연, 혹은 하나님을 향한 비이성적이고 굴종적인 태도. 반대되는 증거가 있음에도 유지되는 관념.”
이 정의 중 ‘두려움’의 요소는 데이비드 흄 같은 종교 비판자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흄은 “종교, 즉 미신은 두려움과 불안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의 사상적 선배인 스피노자 역시 “미신은 두려움에서 생겨나고, 유지되며, 강화된다”고 했다.
복음과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판단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끝없이 나열된 명령과 “그렇지 않으면…”으로 가득 찬 위협 목록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인다면 신앙은 당연히 두려운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은 미신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신이 근거 없는 두려움, 불운, 저주, 보이지 않는 힘에 뿌리를 둔다면,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주권과 선하심 위에 확고히 서 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를 경외함’은(잠언 1:7) 보복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깊은 사랑과 돌봄을 베푸신 분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보면, 미신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두려움으로 대체하고, 지혜를 표징으로 바꾸며, 관계를 의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공식으로 바꾼다. 이런 미신적 사고는 유다가 말한 것처럼 “가만히 스며들어”(유다서 4절) 신앙 안에 자리 잡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신자들은 십자가를 장신구처럼 착용하며 그것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언약궤를 전쟁에서 부적처럼 사용하려다 참패를 당했다(사무엘상 4:3-11). 또 어떤 이들은 기도를 두려움에 기반한 의식으로 전락시킨다. “기도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식이다.
성공을 하나님의 승인과 동일시하는 태도도 있다. 이는 삶의 형편을 일종의 도덕적 징조로 해석하게 만든다. 여기에 “X를 드리면 하나님이 반드시 Y를 주신다”, “이 말씀을 선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하셔야 한다”와 같은 번영 신학적 공식들이 더해지면, 믿음은 거래로 전락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결국 흄과 스피노자가 말한 것과 같은 ‘눈치 보는 신앙’, ‘불안한 신앙’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본래 무엇을 제시하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두려움에 기반한 의식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관계적인 현실 이해로 사람들을 부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알 수 있고, 질문할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 있다.
그러므로 스티비 원더의 노랫말처럼 살아가면 된다. 미신은 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