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리처드 하웰 박사의 기고글인 ‘왜 복음은 지배를 통한 구원을 정당화할 수 없는가’(Why the Gospel cannot endorse salvation by domination)를 14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리처드 하웰 박사는 케일럽 인스티튜트(Caleb Institute)의 설립자이자 총장이다. 그는 1977년에 설립된 하나님의 복음주의 교회(Evangelical Church of God)의 의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불안에 휩싸인 민주국가이든, 자신감에 찬 권위주의 체제이든 많은 시민들은 힘, 결단력, 보호를 약속하는 지도자들에게 끌린다. 이들은 자신을 국가의 구원자, 정체성의 수호자, 질서의 회복자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매혹은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 문제다. 질문은 단지 그런 지도자들이 ‘효과가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종류의 구원을 약속하며, 어떤 종류의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
구원의 또 다른 이야기
강력한 정치 지도자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두려움은 힘으로 제압될 수 있고, 적을 규정함으로써 통합이 이루어지며, 복잡성은 하나의 의지에 권력을 집중함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공적 신뢰는 공동의 제도에서 한 명의 강력한 인물에게로 옮겨진다.
이 이야기는 불안과 상실로 특징지어진 사회에서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는 복음에 맞서는 또 하나의 구원 서사로 기능한다. 이 서사는 하나님께 속해야 할 헌신과 신뢰와 소망을 요구한다. 정치적 힘이 구원의 수단이 될 때, 정치는 다른 방식의 신학이 된다.
“열방과 같은 왕을 우리에게 주소서”
성경은 이 유혹을 일찍이 진단한다.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전쟁을 대신 싸워 줄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그 요청을 허락하시지만, 그 대가를 분명히 드러내신다. 그 왕은 반복해서 “취할 것”이며 땅과 노동과 존엄을 취하고 마침내 백성 자신이 안전을 위해 찾았던 권력에 삼켜질 것이라는 경고다.
이는 정부 자체를 반대하는 주장이 아니다. 정부를 절대화하는 데 대한 경고다. 신명기는 왕에게 제한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군사력의 절제, 부의 절제, 자아의 절제다. 강인한 지도자 정치(strongman politics)는 이러한 한계를 조롱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성경적 비전은 절제가 약함이 아니라 지혜임을 주장한다.
왕권 의식에 대한 예언자적 저항
예언자들은 이 비판을 더욱 날카롭게 한다. 그들은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왕권 의식(royal consciousness)’은 불평등을 정상화하고, 연민을 무디게 하며, 지배를 질서로 포장하는 사회적 상상력을 정면으로 대면한다.
강력한 지도자 문화는 감정과 상상력을 훈련한다. 너무 많이 느끼지 말 것, 너무 깊이 질문하지 말 것, 지도자를 신뢰할 것. 예언자적 신앙은 이러한 훈련을 거부한다. 공적 진실에는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 나그네의 존엄, 통치자의 책임성이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종교가 권력을 성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 예언은 반갑지 않은 목소리로 다시 등장한다.
강압적 권력을 거부하신 예수
예수는 강인한 지도자의 길을 단호히 거부하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주관하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막 10:42–45). 권위는 섬김으로 재정의되고, 위대함은 자기희생으로 측정된다.
이는 교회 지도력에 대한 조언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권력에 대한 공적 신학이다. 십자가는 지배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으며, 영적으로 인간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굴욕, 경멸, 강압을 요구하는 모든 정치 형태는 그리스도의 길과 긴장 관계에 있다.
제국은 또 다른 예배다
요한계시록은 이 경고를 더욱 강화한다. 제국은 단지 폭력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혹적인 존재로 등장하며, 경외와 전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위험은 불의에만 있지 않다. 우상숭배에 있다. 정치는 예전이 되고, 충성은 예배가 된다.
이것이 결정적인 신학적 통찰이다. 강력한 정치 지도자는 단지 거칠어질 유혹이 아니다. 그는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유혹이다. 십자가 없는 구원을 약속하는 대체 구원자다.
질서 있는 사랑과 정치의 한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한다. 사회는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에 의해 형성된다. 정치적 위대함, 안전, 문화적 순수성이 궁극적인 것이 될 때, 불의는 용인되고 잔혹함은 합리화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적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의 궁극성을 거부한다. 지상의 도성은 평화와 정의를 추구할 수 있지만, 구속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그 역할을 떠맡을 때, 정치는 영적으로 위험해진다.
희생양 위에 세워진 통합
강인한 지도자 정치는 종종 적을 지목함으로써 통합을 만들어 낸다. 소수자, 반대자, 언론인, 비판자들은 사회 존립을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르네 지라르의 통찰은 이 패턴을 드러낸다. 사회는 두려움을 희생양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질서를 회복한다.
복음은 이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십자가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는 공적 위협으로 처형되지만, 하나님은 그를 옹호하신다. 십자가로 형성된 교회는 배제와 굴욕 위에 세워진 통합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신앙이 배지가 될 때
강력한 정치 지도자들은 종종 종교를 끌어들인다. 신성한 언어가 차용되고, 신앙은 국가 정체성으로 포장된다. 교회가 맞닥뜨리는 유혹은 미묘하다. 정치적 승리가 영적 신실함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순간 기독교는 고백이 아니라 배지가 된다. 십자가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 된다. 진리는 협상 가능해지고, 이웃은 소모 가능해진다.
두려움 없는 공적 신실함
교회의 소명은 공적 삶에서의 철수가 아니다. 그렇다고 힘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도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 없는 공적 신실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책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이것만은 동의해야 한다. 정치 권력은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의 정치가 우리를 덜 자비롭고, 덜 진실하며, 더 경멸적이고, ‘더 큰 선’을 이유로 불의를 용인하게 만든다면, 그곳에는 영적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제국은 우상처럼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
기독교 신앙은 스캔들 같은 고백을 한다. 우리는 희생을 요구하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희생이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강인한 지도자를 갈망하는 세계에서, 이 고백은 여전히 어리석어 보이지만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공적 증언이 설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