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샘 존스 목사의 기고글인 '관에 담을 수 없는 복음'(The Gospel that won’t fit in a coffin)을 최근 게재했다.
샘 존스 목사는 아이오와주 험볼트에 위치한 어번던트 라이프 크리스천 펠로우십(Abundant Life Christian Fellowship)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저자로도 활동 중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성경의 복음이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소나무 관 속에 넣어져 장례를 기다리는 메시지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복음은 인간이 다가올 죽음을 대비하도록 돕는 작은 메시지가 아니다. 교회는 ‘그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 캐리 고든 목사(Rev. Cary Gordon)
현대 복음주의는 복음을 마치 매우 연약한 것처럼 다룬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작고, 세상을 뒤흔들지 않을 만큼 안전하며, 자기 자리만 얌전히 지키는 겸손한 메시지처럼 취급한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방부 처리해 소나무 관에 조심스레 넣어, 매장을 준비해 둔 것처럼 보인다. “영혼만 구원되면 그 외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이 아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아니다. 사회정의 운동이 퍼뜨리는 위조된 복음을 폭로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진짜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성경이 ‘기쁜 소식’이라 부르는, 세상을 재편하는 우렁찬 선포 말이다.
복음이 실제로 말하는 것
바울은 복음을 가장 명료하게 이렇게 요약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1–6). 이사야는 그 이유를 밝힌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그리고 바울은 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 본문들에서 세 가지 진리가 기둥처럼 떠오른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를 신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가 된다. 복음 이야기에서 억압받은 이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이 진리들은 결코 작지 않다. 이것이 참된 복음의 중심축이며, 동시에 현대 사회정의 복음이 무너지는 지점을 정확히 드러낸다.
사회정의 복음은 ‘피해자’를 바꿔치기한다
사회정의는 인류를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깔끔하게 나눈다. 인종, 성적 지향, 재산, 이민 지위 같은 요소들이 새로운 신분 체계이자 새로운 의와 죄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구속 이야기 속에서 진정으로 억압받은 인물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분만이 배신당하고, 거짓 고발을 당하고, 매를 맞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 그분만이 대속자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공포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분만이 자기 죄가 아닌 죄를 짊어지셨다.
복음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피해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억압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불리한 환경에서 해방이 필요한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한 정당한 결과로부터 구출이 필요한 반역자들이다.
사회정의 복음은 이를 뒤집는다. 인간은 무죄가 되고, 구조가 죄가 되며,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니라 행동주의의 마스코트로 전락한다. 성경적 죄론이 없는 정의는 불가능하며,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다.
사회정의 복음은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기독교 삶의 첫 번째 교훈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우리를 용서하셨다. 복음은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 자비를 베푸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사회정의의 틀은 용서를 할 수 없다. 그 시스템은 불만과 원한을 연료로 삼는다. 그 논리는 회개가 아니라 보상을 요구하고, 화해가 아니라 배상을 요구하며, 죄인의 사면이 아니라 특권층의 처벌을 요구한다.
마태복음 18장의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는 이 비극을 드러낸다. 용서받은 자가 빚 갚기를 요구한다. 사회정의 운동가는 배상을 요구한다. 둘 다 은혜로 변화되지 않은 마음을 보여준다. 용서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의로 위장한 주먹 쥔 손일 뿐이다.
왕을 담기에는 너무 작은 복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셨다(마 24:14). 땅과 분리된 사적인 구원 체험을 말하지 않으셨다. 왕은 오셨고, 왕은 죽으셨고, 왕은 부활하셨으며, 왕은 다시 오신다. 메시지는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라”가 아니다. “왕을 맞이하라”다. 이 나라는 법과 책임, 대사와 권위를 가진 나라다. 민족과 통치자, 문화와 가정, 경제와 정부를 향해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요구한다.
이 현실에 맞서 싸우는 두 가지 현대적 오류가 있다.
첫째, 사회정의 투사다. 정치에는 적극적이지만 다른 복음을 따른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마르크스적 정의를 들여온다. 정의를 외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거부한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그분의 사명은 왜곡한다.
둘째, 경건주의자다. 구원 교리는 바르지만 세상에서는 사실상 부재한다. 좌파의 정치화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경건으로 착각한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않음으로써, 정작 자신들이 한탄하는 이념들에게 공간을 내어준다.
한쪽은 거짓 복음을 붙들고, 다른 한쪽은 참된 복음을 숨긴다. 둘 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저버린다.
왕에게는 대사들이 있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라”(고후 5:20). 대사는 숨지 않는다. 물러서지 않는다. 교회 담장 뒤에 숨어 하늘만 기다리지 않는다. 대사는 선포하고, 경고하고, 간청하며, 부활하신 왕의 평화 조건을 알린다.
예수의 첫 설교는 분명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이 나라는 회개의 부름과 의로움의 요청, 심판의 경고를 동반한다. 충성, 순종,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공적 충성을 요구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단순한 개인 구원보다 크고, 정치만큼 좁지도 않으며, 나라들을 흔들고 문명을 다시 일으킬 만큼 크다.
교회가 이 복음을 회복한다면
교회가 다시 왕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며, 마르크스적 정의에 굴복하지 않고, 경건이라는 이름의 무기력 뒤에 숨지 않는다면, 사회정의 이념은 말재주가 아니라 부활하신 왕의 무게 앞에서 무너질 것이다. 그 나라는 흔들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매장을 기다리는 메시지가 아니다. 선포를 기다리는 메시지다: 가정에서 선포하라. 직장에서 선포하라. 공적 광장에서 선포하라. 정부의 회랑에서 선포하라. 왕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라. 그리고 마침내, 오직 이 말만을 듣게 될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