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당신의 사랑의 언어는 상담인가?’('Is therapy your love language?)를 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문화적 흐름에 조금이라도 익숙하다면, 새로운 종류의 심리학적 언어를 이미 들어봤을 것이다. 이른바 ‘테라피 스피크(therapy-speak)’다. 이는 상담이나 심리학 용어를 일상 대화 속에서 사용해 감정, 관계, 심지어 갈등까지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언어 방식이다. 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감정 너머의 현실을 회피하면서도 마치 깨달은 것처럼 들릴 위험도 있다.
테라피 스피크의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 감정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해.”, “나는 자기 돌봄과 자기 사랑을 실천하고 있어.”, “나는 개인적 성장을 위해 집중하고 있어.”, “나는 내 감정을 존중해야 해.”, “그건 미시적 공격(microaggression)이야.”
그렇다면 테라피 스피크는 얼마나 널리 퍼져 있을까. 한 전국 단위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 가운데 외래 심리치료를 이용한 비율은 2018년 6.5%에서 2021년 8.5%로 증가했다. 이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그것을 일상 대화 속으로 가져오고 있다는 뜻이다.
2025년이 되자 한 대규모 설문조사는 미국인의 거의 4분의 1이 치료사를 만나고 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향후 1년 안에 상담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서 그 비율이 높았다. 또 다른 2025년 Z세대 조사에서는 진단받았거나 스스로 의심하는 정신적·심리적 상태의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상담은 늘고, 콘텐츠는 많아지고, 라벨은 증가하며, 테라피 스피크 역시 확산되고 있다.
분명히 해두고 싶다. 필자는 심리학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상담실에서 사람들과 함께해 왔고, 상담은 실제로 도움이 된다. 언어는 중요하다. 공황, 상실, 트라우마, 강박, 우울, 수치심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때로 라벨은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제공한다. 그것은 이렇게 말해 준다.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여기에 패턴이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있다.”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
그러나 테라피 스피크는 일상의 삶을 위기 상황처럼 느끼게 만들 수 있다. 모든 거친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고, 모든 기분 저하는 병리가 되며, 모든 의견 차이는 ‘해악’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필자는 상담자들에게 이런 말을 반복해서 전한다. “모든 것을 병리화하지 말라.” 삶은 어렵다.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러나 모든 고통스러운 일이 진짜가 되기 위해 반드시 진단명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를 ‘일상의 의료화(medicalization of everyday life)’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범한 인간의 struggles가 점점 치료 계획을 요하는 장애로 취급되는 것이다. 상담이 특정한 도움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매주 유지 관리처럼 자리 잡기 시작하면, 일상적인 고통마저 전문가의 명명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증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더 깊은 문제는 따로 있다. 심리학 이론과 라벨은 “모든 것이 이해된다”는 느낌을 주어 안도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라벨이 인간됨의 전부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짠 물 한 컵을 ‘설탕물’이라고 부르면, 설탕을 좋아하는 사람은 잠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한 모금 마시는 순간, 현실은 즉시 그 착각을 바로잡는다.
자기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다시 이름 붙일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기심을 ‘자기 돌봄’이라 부르거나, 회피를 ‘내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분명한 목표는 라벨을 모두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언어가 현실과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만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더 세련된 언어로 삶을 관리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더 큰 목적을 놓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닌다. 기독교가 ‘더 나은 어휘’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1, 14). 그분의 말씀은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창조하시고, 그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마침내 심판하실 분의 권위를 지닌 말씀이다.
이 사실은 ‘치유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그리스도는 라벨을 건네는 상담자처럼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깨어진 것을 실제로 다룰 수 있는 구원자처럼 말씀하신다. 그분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우신다(요한복음 11:35). 두려움을 이름 붙이시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내신다(마태복음 6:25–34).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다(시편 34:18). 자기 내면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참된 안식으로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신다(마태복음 11:28–30).
상담은 기능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삶을 안정시키고, 도구를 제공하며, 다시 숨 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기독교는 심리학이 할 수 없는 주장을 한다. 그것은 구원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고통과 죽음이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는 의미를 제공한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대처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신다. 그분은 최후의 원수에 대한 권위를 선언하신다. 고통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가 참된 원수를 정복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26).
부활이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은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격려에 머물지 않는다. 그분의 주장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 곧 빈 무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죽음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며,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그분의 말씀은 슬픔과 죽음을 ‘관리’하도록 돕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들을 정복한다.
사도 바울은 이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린도전서 15:14). 이것은 테라피의 언어가 아니다. 부활의 언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멀찍이 서서 해설을 덧붙이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의 조건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죄와 슬픔을 친히 자신의 몸에 지셨다(이사야 53:4–6; 베드로전서 2:24). 하나님은 공감만이 아니라 구속으로 우리를 만나신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다. 부활은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다”라고 선언한다(요한계시록 21:4–5). 단순한 완화를 약속하지 않고, 회복을 약속한다. 정의와 재회, 그리고 죽음이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진 세계를 약속한다.
복음은 어떤 자기 정의의 어휘도 초월한다. 복음은 우리가 성취하기 전에 이미 누구인지를 말해 주고, 진짜로 죄가 있을 때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며, 이야기가 아플 때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당장 고쳐지지 않더라도 우리의 고통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이유를 제시한다(로마서 5:3–5; 고린도후서 4:16–18).
상담과 그 언어는 삶을 관리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은 관리가 아니다. 부활은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