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서 최고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예배임을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 43:21), 그런데 이렇게 예배가 우리의 최고의 우선순위가 되는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예배의 한 요소나 순서가 아니라, 예배 그 자체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많은 계명 중에 내가 꼭 지켜야 할 하나의 계명을 뽑아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삶의 방향과 의미와 목적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사랑이 바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문일준 - 예배 회복 작전 타임
현대 기독교 문화는 우리에게 복음을 구원에 대한 지침으로 보도록 장려하지만, 이것은 복음을 정확히 보는 관점이 아닙니다. 그 지침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모두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신과 나는 죽음과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공정하신 재판장이시기에, 우리에게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머지않아 죽음과 형벌은 우리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정하심(fairness)은 대속(substitution)을 허용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지침들은 복음이 아닙니다.
매튜 W. 베이츠 – 복음을 정확하게
살다보면 시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시련을 주실까요? "너희 믿음을 알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자꾸 피하고 싶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의 점수를 알 길이 없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올 때 믿음으로 대응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이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늘 불안하지 않습니까? 내 믿음은 몇 점일까 하면서 불안하잖아요. 시련이 올 때 진짜 믿음의 점수가 나옵니다. 그것이 테스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내 믿음을 점검하는 일종의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것입니다. 리트머스는 대상이 산성인지, 알칼리성인지에 따라 색깔이 바뀌잖아요. 그 점수를 알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박광리 - 쇼츠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