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다: ‘우리’와 ‘그들’을 넘어서는 시선

브라이언 해리스 박사.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브라이언 해리스 박사의 기고글인 ‘예수님의 눈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다’(Seeing others through the eyes of Jesus)를 1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해리스 박사는 컨설팅 회사인 Avenir Leadership Institute를 이끌고 있으며 이 단체는 전 세계에 필요한 리더 양성을 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그날의 대화는 필자가 경험한 것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기묘한 편에 속하다. 우리는 막 뉴질랜드로 이주한 상태였고, 머물게 될 교회 사택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임시 거처에서 지내고 있었다. 새로 온 사람으로서 이웃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필자는, 왼쪽 집 이웃이 마당에 있는 것을 보고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

그는 매우 친절했고, 필자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에 관심을 보였다.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다음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 나라는 정말 완벽한 나라예요.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이 나라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이민자들만 없으면 완벽할 텐데요. 그들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있어요.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그는 이민자들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해 한참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여기서 아주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뉴질랜드에 오신 걸 환영해요. 당신이 여기 와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필자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나라를 망치는 끔찍한 이민자 중 한 명이 바로 나인데, 기분 나빠하고 방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의 환영 인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의 환영은 진심이었고, 따뜻했다. 그는 필자가 이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기뻐했고, 이웃이 된 것을 기쁘게 여겼다. 필자가 이민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자를 ‘이민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확실하지 않다. 필자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분명히 말했고, 그는 그에 대해 여러 질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자를 이민자로 보지 않았다. 영어가 모국어이고 비교적 유창하게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피부색 때문일 수도 있으며, 처음 인사를 하며 우리 집 레몬나무에서 딴 레몬 몇 개를 건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필자를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로 여겼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무엇인가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끼고,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다.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놀라운 사건을 떠올려 보라. 한낮에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문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 대화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서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예수님은 유대인이었고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가깝지만 결코 하나가 아닌’ 친족이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증오했다. 사마리아인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그 땅에 남아 앗수르인들과 혼혈이 이루어지면서 형성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흔적을 유지했지만, 이방인과 통혼했고, 다른 성전에서 예배했으며, 율법도 다르게 이해했다. 유대인의 눈에 사마리아인은 완전히 배제된 존재였다. 두 집단은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둘째, 유대인 남성은 여성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것은 극히 부적절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사마리아 남성과 대화했어도 이상했을 텐데, 사마리아 여성과 대화를 나누다니—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싶을 정도다.

셋째, 그 시간은 정오였고, 그 여인은 혼자 물을 길으러 나왔다. 매우 중요한 단서다.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사회에서, 왜 하루의 시작에 하던 물 긷는 일을 가장 더운 시간에 혼자 하고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녀가 공동체의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여자들이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배척당했고, 홀로 살아가도록 내몰렸다. 곧 그 이유도 드러난다.

넷째, 그녀는 단순한 주변인이 아니라 매우 문제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무려 다섯 번이나 결혼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는 남편도 아니었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그녀는 분명 ‘위험한 여자’였고, 남편이 말 섞는 것을 원치 않을 만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멈춰 서서 그녀와 대화하셨을까? 좋은 질문이다. 분명 외형이나 평판을 신경 쓴 행동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판단력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그녀에게 말을 거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녀를 다른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과거도 현재도 문제가 많은 수상한 사마리아 여인으로 낙인찍었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여인으로 보셨다.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사소한 요소들을 모두 벗겨내고 나면, 그곳에는 타락한 여인이 아니라 상처 입은 하나님의 형상, 집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어딘가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의 깊은 공감은 표면 너머를 보게 했고,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했다. ‘그들’과 ‘우리’, ‘내부자’와 ‘외부자’로 나뉜 세상에서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필자의 시선이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있다. 만약 필자가 더 자주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관계가 변화되고, 얼마나 많은 대화가 새로워질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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