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섭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눈살을 찌푸리는 섭리 뒤에: 하나님과 힘든 시기’(Behind a frowning providence: God and tough times)를 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2025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필자에게도 힘든 한 해였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 필자의 아내는 용감하게 유방암 치료를 견뎌냈고, 아직 회복 중이다. 또한, 가족의 뜻밖의 4기 암 진단, 금전적 어려움, 예상치 못한 사건들, 예를 들어 아내 형제 친구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일 등 이 모든 것이 필자의 주변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성경은 “슬픔이 웃음보다 나으니, 얼굴의 근심으로 마음이 즐거워진다”(전도서 7:3)라고 말하지만,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거의 항상 어렵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답을 제시했다. 그는 이를 불안 치료를 위한 네 가지 처방(테트라파르마코스)이라고 불렀다:

1단계: 신을 잊어라. 두려움과 형벌이 관련되니, 잊는 것이 좋다.
2단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신이 없으면 죽음 이후에도 두려움이 없다. 태어나기 전과 같을 뿐이다.
3단계: 고통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고통은 사라지거나 죽음을 부른다. 죽는다면 2단계를 참조하라.
4단계: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만 추구하라. 다른 욕망은 무의미한 추구로 이어지므로 거절하라.

필자는 플로리다 리조트의 수영장에서 이 방법을 처음 접했을 때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옆 수영장의 한 남자가 “맞는 것 같네요!”라고 말하고 떠났지만, 그는 4단계를 어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에피쿠로스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많은 불교인들이 시도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깊고, 도덕적으로 중요한, 불가피하거나 책임과 연결된 고통은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필자는 여전히 “왜? 왜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필자는 성경이 고통이 도덕적 의미를 가지며, 영적 중요성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역사에 관여하시기에 구속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필자 또한 여전히 ‘왜?’라는 질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로널드 던 박사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를 알면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 어디를 가든, 어떤 모임을 가든, 사람들은 ‘왜?’라고 묻는다.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왜’라는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으신다.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흔히 ‘주님,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며 하나님을 재는 셈이다.”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려 하기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교리를 기억해야 한다. 라틴어로 ‘pro’(미리)와 ‘video’(보다)에서 온 섭리란 ‘미리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이 미래를 단순히 내려다본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하시며, 그분의 주권 아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욥기 23장 14절은 “그가 나를 위하여 정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시리니, 그의 마음 속에는 수많은 것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스코틀랜드 목사 존 J. 머레이는 『눈살을 찌푸리는 섭리 뒤에(Behind a Frowning Providence)』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소 짓는 호의로운 섭리도 있고, 어둡고, 거슬리거나 찡그린 듯한 섭리도 있다.” 전자는 필자가 좋아하는 섭리이고, 후자는 힘든 시간을 가져오는 섭리다.

솔직히 말하면,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닥치면 필자는 하나님의 목적을 찾기보다는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맞는가?

그러나 머레이는 그런 섭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도록 네 가지 중요한 점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그분의 계획 또한 완전하다. 때로는 그렇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 계획은 포괄적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가장 작은 일까지 포함된다. “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느니라”(마 10:30).

계획은 우리의 궁극적 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때로 하나님의 계획은 숨겨져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유를 일찍 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필자는 욥처럼 삶이 무의미해 보일 때가 있지만, 순간적으로 진실을 깨닫기도 한다. 혹은 요셉처럼 형들에게 구덩이에 던져진 후 22년을 기다려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다. 혹은 평생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은 거울로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전 13:12)는 말씀을 기억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필자는 솔직히 2026년이 2025년보다 나을지, 아니면 더 힘들지 두려움과 함께 궁금해한다. 영국 시인 겸 성공회 찬송 작가 윌리엄 카우퍼의 시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다(Light Shining Out of Darkness)>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신뢰를 되새기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두려운 성도여, 새 용기를 가져라, 네가 두려워하는 구름은 자비로 가득 차서 네 머리에 축복으로 쏟아지리라. 약한 감각으로 주를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를 신뢰하라. 눈살이 찌푸리는 섭리 뒤에 미소 짓는 얼굴이 숨겨져 있다. 그분의 계획은 빠르게 성숙하며, 매 순간 펼쳐진다. 꽃봉오리는 쓴 맛일지라도, 그 열매는 달콤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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