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계 속 선교가 직면한 질문들: 신학적 성찰과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

에디 아서 박사. ©fiec.org.uk/people/eddie-arthur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에디 아서 박사의 기고글인 ‘신학이 답이지만, 우리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가?’(Theology is the answer, but are we afraid to ask the right questions?)를 최근 게재했다.

에디 아서 박사는 와이클리프 성경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영국에 거주하며 글로벌 선교의 미래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사회 변화에 대한 맥락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지난 몇 주 동안 필자는 국제 선교 단체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곱씹어 보았다. 솔직히 말해, 이런 질문들은 교회 전체가 마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영향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아래는 특별한 순서 없이(일부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씨름해야 할 몇 가지 이슈를 나열한 것이다. 이어서 몇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세계 질서의 붕괴 ▲인공지능의 영향력 확대 ▲기후 비상사태 ▲빈곤층과 초부유층 간의 증가하는 격차 ▲증가하는 이주 ▲제도 전반에 대한 신뢰 상실(교회를 포함) ▲인간의 성(sexuality)과 젠더의 본질.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일부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무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이런 문제들은 ‘세상 것’이지 ‘교회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목사의 아들이 여성으로 전환하고 싶다 말하거나, 이란인 12명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 교인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직면해야 하며, 목사의 아들(그리고 목사 자신)도 교회의 삶에 계속 참여할 수 있도록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

특히 문화 간 사역을 수행하는 선교 단체들은 영국, 유럽, 미국의 교회들보다 훨씬 긴급하게 이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서는 기후 변화가 더운 여름 정도로만 느껴질 수 있겠지만(지리적으로 북쪽에 사는 이들은 “좋다!”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는 이들은 이미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그리고 극심한 기상 현상의 증가를 체감하고 있다.

변화하는 세계 질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다국적 기업의 성장과 재화 및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을 촉진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러한 조건은 기독교 선교 단체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었다.

여행의 자유와 특정 서구 여권의 영향력은 선교사들이 각국에 쉽게 정착하도록 만들었다. 구조적으로도 선교 단체들은 다양한 지역에 지부나 자회사를 두는 대기업의 운영 방식과 유사한 형태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세계 질서가 변하고 중국이 점점 더 영향력을 키우며 미국이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가면서, 기존 구조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기독교 기관과 교회가 변화에 직면할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응할 때 관리적·구조적 차원에서—즉 방식의 변경으로—접근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물론 새로운 현실들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구축해야 할 가능성이 높지만, 더 큰 도전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것인가, 즉 신학이 우리의 구조와 활동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이다.

국가 간 적대감이 커지고 갈등이 멀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성찰해야 한다. 서로 다른 나라에 속한 형제자매들은 단순한 국적 이상으로 묶여 있다. 우리의 일차적 충성은 어떤 국가나 정권, 이념이 아니라 만왕의 왕께 있다.

따라서 갈등이 증가하는 시대,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국경을 넘어 사랑하고 성장하며 용서하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세상의 시스템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다국적 환경에서 사역하는 선교 단체들은 이 문제를 더욱 절박하게 느낀다. 팀 구성원들은 각자가 속한 국가 사이의 적대 관계를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단순히 갈등을 덮어두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증가하는 이주

이민 문제는 국적의 문제를 교회 앞에 제기한다. 이민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엄청난 복음 전도 기회를 제공한다. 동시에 이민자들 중 많은 이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기도 하여 서구의 여러 교회를 강하게 세워주고 있다.

그러나 이민의 진짜 도전은 서구로 오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가보다 더 큰 것에 충성을 두고 있는 사람들로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상충하는 압력으로 가득한 이 현실에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낯선 이들을 환대하라는 부르심이 있는 동시에, 낯선 이들을 불편해하는 이웃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부르심이 우리에게 있다.

성(sexuality)과 젠더의 유동성

인간의 성과 젠더 문제를 살펴보자. 필자가 자란 복음주의 환경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매우 흑백 논리적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드셨지, 아담과 스티브를 만든 게 아니다.”

동성 관계나 젠더 전환은 당연히 잘못됐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훨씬 더 복잡했다. 동성 관계는 현대의 문화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오래된 인간 현상이며, 젠더 역시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설명된 적이 없었다. 유전적·신체적·심리적 이유로 단순한 남성/여성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세계를 항해해야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의 삶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평화롭게, 온유하게 다루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깊은 소외를 느껴 고통스러운 수술과 정체성의 전환을 감수하려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말할 수 있는가?

또 한편으로 과거 여성 전용 공간을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끼는 여성들도 돌봐야 한다.

필자가 제기한 어려운 문제들에 답을 제시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필자에게도 답은 없다. 답이 있었다면 책을 써서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모든 질문의 답이 결국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확신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종교적 과시를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잘못된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기꺼이 하셨던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필자가 오늘의 어려운 문제들을 붙잡는 열쇠가 있다고 믿는 곳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말할 때 우리는 쉽게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의 틀에만 머물러 생각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벌을 받으셨고 우리는 용서받는다는 사고방식이다. 대속의 본질에 관한 긴 논의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지만, 형벌 대속은 성경이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그분은 원수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무력화하셨다(골 2:15).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또 다른 속죄의 그림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19–20)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 그렇다면 분열된 우리의 세계에서 이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가 앞에서 제기한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화해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신학을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무 자주 신학은 어려운 책더미로만 여겨진다. 신학이란 교리가 단단히 굳어져 세대에서 세대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신학은 살아 있는, 상황에 민감한 방식으로 삶의 큰 질문들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11세기에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말했으며, 우리는 이 접근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속죄의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형벌 대속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의 개념을 명확히 가지고(세부 사항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벌과 용서의 필요성을 이해하던 사회에서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세계에 살지 않으며, 매우 다른 질문들과 마주하고 있다(오해 없기를 바란다. 필자는 죄의 현실이나 용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는 가장 적절한 출발점인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준비된 답이 담긴 책을 찾아보기보다, 우리는 성경 속으로 다시 파고들어 오늘의 세계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어려운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언급한 질문 중 하나로 돌아가 보자. 성경은 목사의 아들이 성전환을 선언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면, 예수님을 그 상황 속에 어떻게 모셔올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자비와 하나님의 뜻/정의를 예수님처럼 어떻게 균형 있게 적용할지를 분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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