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복음서마다 첫머리에서 보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의 제목은 각 저자들이 붙인 것 이 아니라 주후 2세기 이후 필사되는 과정에서 추가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바울 역시 에우앙겔리온을 말할 때 그 어디에서도 ‘기록된 책’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복음”은 “복음서” 이전부터 존재했고, “복음서” 바깥에서 존재했다. 다시 말해, 복음은 본래 말로 표현되었고, 삶으로 전달되었다. “복음”은 그것을 전하고 살아내는 사람의 진정한 목소리와 말로 표현되었다. 오늘날은 복음을 어떤 공식처럼 외워서 전달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복음이 다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완성된 계시’로서 성경이 주어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복음은 특정 교리나 신조에 갇힐 수 없다. 삶으로부터 유리된 개념, 도그마, 용어로서의 복음은 사실상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 복음은 글이기 이전에 말이다. 복음은 글이기 이전에 삶이다.
조재천 – 신약 언어 수업
하나님은 야곱이 잘 나가던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벧엘은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은혜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야곱의 벧엘은 곧 우리 인생의 ‘다시 시작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가 처해 있는 상황과 형편을 다 아시지요? 이 상황을 역전시켜 주시고 눈엣가시 같은 그 사람을 변화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상황이나 사람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야곱처럼 나 자신을 철저히 깨뜨리십니다. 이를 통해 변화되고 난 다음에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깨어짐이 곧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항복당하는 것이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김은호 – 다시! Again, Again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자랑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일이 가능할까.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을 편협한 진리에 빠진 자로 불쌍히 여기지만, 편협한 진리에 빠진 자들은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편협한 진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아닌 진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라, 삶의 회복을 위한 지혜로운 행위다. 성도는 늘 말씀을 먹으며, 말씀대로 행하고, 말씀을 전하고 나누기 위해 늘 말씀으로 채워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 분명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날이 반드시 온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너무도 중요하다. 인간이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나 서로 교제할 때, 자주 만나 교제하면 더욱 친해지듯 하나님과의 만남도 이와 같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함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개인적, 인격적, 정기적인 만남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개인적’이란 하나님과의 일대일 교제를 뜻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여러 사람과 함께 만나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일대일로 만나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소그룹과 대그룹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성도라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일대일 만남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조철민 - 말씀 묵상, 삶의 공간을 채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