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특별히 기록된 성경의 책’(The book of the Bible written specifically to unbelievers)을 1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어느 면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책은 불신자들을 향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본래 상태가 결코 선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라고 기록했고, 욥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욥기 15:14)라 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 17:9)라고 선언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과거의 상태를 회상하며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골로새서 1:21)라고 했다.
모두가 그와 같은 출발선에 서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순히 또 하나의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알려주셔야 한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를 일관되게 보여주며, 그래서 “모태로부터 곁길로 나아간”(시편 58:3)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 자체에는 본질적인 보상이 없다는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물질 세계와 자연은 결국 인간을 상처 입히고, 아무리 애써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사라지게 만든다.
이 사실은 철학자들에게도 간과되지 않았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구토』에서 인생을 ‘허무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공허한 거품’으로 묘사했다. 인간이 용기 있게 이를 직시하면 구역질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특징을 “Unheimlichkeit(불안, 낯섦)”라 불렀다. 이는 모든 인간이 느끼는 기묘한 감각, 곧 고향을 잃은 듯한 소외와 깊은 외로움이다.
알베르 카뮈도 동의했다. 그는 소설 『전락』에서 “아름다움은 견딜 수 없다. 잠시 영원의 한 조각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것을 시간 전체로 늘리고 싶다… 하나님도, 주인도 없는 고독한 자에게 날마다의 무게는 끔찍하다… 이런 사상에 깊이 빠진 자는 결국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버트런드 러셀 역시 이렇게 표현했다. “오직 꺾이지 않는 절망 위에만 영혼의 거처를 안전하게 세울 수 있다.”
참으로 ‘희망적인’ 진단이다. 하지만 수천 년 전 이미 이와 같은 통찰을 담은 성경의 책이 있다. 바로 전도서이다.
전도서: 불신자들에게 전하는 교훈
많은 성경학자들은 전도서가 불신자와 불가지론자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두 장은 노골적으로 무신론을 다루고, 나머지 열 장은 주권자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다룬다. 저자의 말은 읽는 이를 고개 끄덕이게 하다가도 불편하게 만들고, 곧 의아하게 만든다.
전도서는 ‘전도자’(히브리어 ‘코헬렛’)의 말로 시작된다. 어떤 성경은 이를 ‘전도자’, 어떤 번역은 ‘교사’, 혹은 ‘교수’라고 번역한다. 후자의 의미가 더 적절하다. 그는 하나님 없는 삶(“해 아래의 삶”)을 강의하는 교수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토미 넬슨은 저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문제』에서 전도서의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인생은 그것에 투자한 자들을 파산시킨다. 무질서(entropy)가 주권자다.” 참으로 ‘희망적인’ 결론이다.
하나님을 밀쳐낸 인생은 결국 지성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라는 길을 거쳐가지만, 그 모두가 공허함으로 끝난다. 전도자는 이를 “바람을 잡으려는 것”(1:14)이라 묘사한다. 아무리 애써도 붙잡을 수 없다. 밥 딜런이 노래했듯, “그 답은 바람 속에 불고 있다.”
헛됨을 마주하는 인생
결국 이 길은 좌절, 공허, 깊은 상처로 이어진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묻는다. “나의 고통이 어찌하여 계속하며 나의 상처는 어찌하여 고쳐지지 아니하고 낫지 아니하나이까?”(예레미야 15:18).
필자는 수십 년 동안 바로 이런 지속적인 고통을 가까이서 보아왔다. 필자의 경력은 데이터베이스 엔지니어에서 출발해 실리콘밸리의 여러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최고제품책임자로 이어졌는데, 그곳은 부와 지위의 정점이자 동시에 가장 불행한 이들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필자는 한 번은 한 유망 소프트웨어 회사의 CEO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팔에 “나는 위대하다”라는 문신까지 새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6개월 뒤 그는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결국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에 부딪힌 것이다.
전도자는 하나님 없는 삶을 이렇게 그린다. 그는 의도적으로 우울한 그림을 그리고, 결코 기분 좋은 결론으로 끝내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전도서를 오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전도서를 읽으며 우울해져야 한다. 지성·쾌락·물질에 의지하는 길이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목적이다.
전도자는 양팔을 흔들며 외친다. “비인격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무의미하고, 목적 없는 우주가 우연히 인격적이고, 도덕적이며, 의미와 목적을 갈망하는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 그 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먹고 즐거워하며 누가 하나님 없이 누릴 수 있으랴”(전도서 2:25). 결국 누구도 불가능하다.
하나님 없는 길과 하나님 있는 길
학문을 신격화하면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 쾌락을 좇으면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2:1). 물질을 추구하면 결국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고 해 아래에서 무익하였도다”(전도서 2:11).
영국의 철학자이자 저자, 교사, 방송인이었던 시릴 조드(Cyril Joad)도 이를 깨달았다. 그는 한때 인류가 점점 더 진보하여 하나님이 필요 없을 것이라 믿었지만, 2차 세계대전과 사회의 도덕적 추락을 목격한 후 무신론을 버리고 『믿음의 회복』을 저술했다. 그는 하나님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옳았다.
따라서 우리는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네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즐겁게 먹고, 기쁨으로 마시며, 사랑하고, 기쁨으로 일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끝으로, 익명의 누군가가 지은 짧은 시가 전도서를 잘 요약하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마친다: “기쁨으로 먹고, 즐거움으로 마시라. 사랑으로 걷고, 기쁨으로 일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것이 전부다.”